•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2장 혼인의 다원성과 국제성
  • 1. 설화를 통해 본 고려 건국 전후의 혼인
  • 태조 왕건의 혼인
권순형

개성 지역의 혼인 풍속은 고려 건국 뒤 어떻게 변했을까? 그리고 왕실의 혼인은 일반인의 혼인과 얼마나 달랐을까? 태조 왕건의 혼인 사례는 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왕건은 후비(后妃)를 29명이나 맞았다. 『고려사』 「후비전」에는 이에 관한 여러 일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혼인의 유형을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시침(侍寢)의 유형이다. 신혜왕후 유씨, 대·소서원부인 등의 사례가 이에 속한다. 신혜왕후 유씨는 정주(貞州) 출신으로 이중대광(二重大匡) 유천궁의 딸이다. 그의 집은 큰 부자라 고을 사람들이 장자(長者) 집이라고 불렀다. 태조가 궁예의 부하로서 장군이 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정주를 지나가다가 수령이 오래된 버드나무 밑에서 말을 쉬고 있는데, 왕후가 길 옆의 시냇가에 서 있었다. 태조가 그녀의 얼굴이 덕성스러움을 보고 “누구의 딸이냐?”고 묻자 처녀는 “이 고을 장자 집 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태조가 그 집으로 가자 그 집에서는 군대를 잘 대접하고 왕후에게 태조를 모시고 자게 하였다. 그 후 서로 소식이 끊기자 처녀는 정절을 지키고자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태조가 이 소식을 듣고 처녀를 불러다가 부인으로 삼았다.

대서원부인 김씨와 소서원부인 김씨는 동주(洞州) 사람 대광 김행파 (金行波)의 딸이다. 김행파는 활을 잘 쏘고 말도 잘 탔으므로 태조가 김(金)이라는 성(姓)을 주었다. 태조가 서경으로 가는데, 김행파가 사냥꾼들을 데리고 가다 길가에서 만나 자기 집으로 청해 이틀 밤을 유숙시키면서 두 딸에게 하룻밤씩 모시게 했다. 그 후 다시 상관하지 않자 두 딸은 모두 집을 떠나 여승이 되었다. 태조가 그들을 불쌍히 여겨 불러서 만나보고 “그대들이 이미 여승이 되었으니 그 결심은 꺾을 수 없구나!”라고 말하더니 서경 성 안에 대서원(大西院), 소서원(小西院)이란 두 절을 짓고 토지와 농민을 예속시킬 것을 명령하여 그들에게 각각 거처하게 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대서원부인, 소서원부인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시침이라면 ‘잠자리 시중’이라는 의미로,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 혼인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왕건이 시침을 요구한 것도 아니고 호족이 스스로 딸을 제공한 것이다. 시중을 든 여자에게 왕건은 어떤 공식적인 의무도 없었던 듯하다. 앞의 사례에서 ‘소식이 끊겼다’거나 ‘다시 상관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이를 말해 준다. 시침을 든 호족 딸들은 혹시 그 일로 임신하였다면 왕건의 부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신이 되지 않았거나 임신했어도 딸을 낳았다면 다른 사람과 혼인하기도 했다. 왕건의 부인이 29명인데, 이 사이에서 난 자식이 25남 9녀라는 자연스럽지 않은 성비(性比)가 이런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간혹 앞의 여성들처럼 수절을 하는 경우가 있었고, 이때 왕건은 모른 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시침은 통일신라시대에 손님을 환대하는 뜻에서 모시고 자게 한 무진주 아전 안길(安吉)91)『삼국유사』 권2, 기이2, 문호왕 법민.의 예를 연상시킨다. 시침이 비록 정식 혼인은 아니지만 이렇게나마 인연을 맺으면 왕건과 해당 호족 사이에는 유대가 생겨났을 것이다. 시침은 당시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각지에 할거하던 호족들에게는 유력한 미래의 군주 왕건과의 끈을 형성하는 통로였으며, 왕건으로서는 호족이 자기편으로 들어왔음을 확인하는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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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현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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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정략혼(政略婚)이다. 정략혼의 전형적인 예는 신라 왕실과의 혼인이다. 왕건은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의 딸(신성왕태후)과 혼인했을 뿐 아니라 경순왕에게 자신의 맏딸을 시집보내 이중으로 혼인 관계를 맺었다. 이로써 왕건의 위상은 한층 높아질 수 있었다. 또한 왕건은 견훤의 사위 박영규의 딸(동산원부인)도 취해 명실 공히 혼인 면에서도 후삼국 통일을 달성하였다. 이 밖에도 왕건의 혼인은 대부분 정략혼이어서 ‘혼인 정책’이라고까지 불릴 정도이다. 왕건은 전국 각지의 호족 및 자신의 측근 딸들과 혼인해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후삼국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후비의 지역과 가문은 표 ‘태조 후비 일람’과 같다.

<표> 태조 후비 일람
후비의 이름 아버지의 관직과 성명 출신지
1 신혜왕후 유씨(神惠王后柳氏) 이중대광 유천궁(柳天弓) 정주(경기도)
2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吳氏) 다련군(多憐君) 나주(전라도)
3 신명순성왕태후 유씨(神明順成王太后劉氏) 태사 내사령 유긍달(劉兢達) 충주(충청도)
4 신정왕태후 황보씨(神靜王太后皇甫氏) 태위 삼중대광 충의공 황보제공(皇甫悌恭) 황주(황해도)
5 신성왕태후 김씨(神成王太后金氏) 잡간 김억렴(金億廉) 경주(경상도)
6 정덕왕후 유씨(貞德王后柳氏) 시중 유덕영(柳德英) 정주(경기도)
7 헌목대부인 평씨(獻穆大夫人平氏) 좌윤 평준(平俊) 경주(경상도)
8 정목부인 왕씨(貞穆夫人王氏) 삼한 공신 태사 삼중대광 왕경(王景) 명주(강원도)
9 동양원부인 유씨(東陽院夫人庾氏) 태사 삼중대광 유금필(庾黔弼) 평주(평안도)
10 숙목부인(肅穆夫人) 대광 명필(名必) 진주(경상도)
11 천안부원부인 임씨(天安府院夫人林氏) 태수 임언(林彦) 경주(경상도)
12 흥복원부인 홍씨(興福院夫人洪氏) 삼중대광 홍규(洪規) 홍주(충청도)
13 후대량원부인 이씨(後大良院夫人李氏) 대광 이원(李元) 합주(경상도)
14 대명주원부인 왕씨(大溟州院夫人王氏) 내사령 왕예(王乂) 명주(강원도)
15 광주원부인 왕씨(廣州院夫人王氏) 대광 왕규(王規) 광주(경기도)
16 소광주원부인 왕씨(小廣州院夫人王氏)
17 동산원부인 박씨(東山院夫人朴氏) 삼중대광 박영규(朴英規) 승주(전라도)
18 예화부인 왕씨(禮和夫人王氏) 대광 왕유(王柔) 춘주(강원도)
19 대서원부인 김씨(大西院夫人金氏) 대광 김행파(金行波) 동주(황해도)
20 소서원부인 김씨(小西院夫人金氏)
21 서전원부인(西殿院夫人) 미상 미상
22 신주원부인 강씨(信州院夫人康氏) 아찬 강기주(康起珠) 신주(황해도)
23 월화원부인(月華院夫人) 대광 영장(英章) 미상
24 소황주원부인 박씨(小黃州院夫人朴氏) 원보 순행(順行) 황주(황해도)
25 성무부인 박씨(聖茂夫人朴氏) 삼중대광 박지윤(朴智胤) 평주(평안도)
26 의성부원부인 홍씨(義城府院夫人洪氏) 태사 삼중대광 홍유(洪儒) 의성(경상도)
27 월경원부인 박씨(月鏡院夫人朴氏) 태위 삼중대광 박수문(朴守文) 평주(평안도)
28 몽량원부인 박씨(夢良院夫人朴氏) 태사 삼중대광 박수경(朴守卿)
29 해량원부인(海良院夫人) 대광 선필(宣必) 해평(경상)

왕건의 후비들은 전국에 분포되어 있지만 특기할 만한 것은 한 집안에서 후비가 여러 명 배출되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자매혼도 보인다는 점이다. 패강진이 설치된 군사 요충지 평산의 박수경 집안에서는 그의 누이(성무부인)와 질녀(월경원부인), 딸(몽량원부인)이 모두 후비가 되었다. 서해 해상 무역의 요지였던 정주 유씨 집안(신혜왕후, 정덕왕후)과 강릉의 대표적 호족인 왕씨 집안(정목부인, 대명주원부인)에서도 각각 두 명씩 후비가 배출되었다. 고대 삼국의 치열한 쟁패 지역이던 한강 유역에서는 광주 호족 왕규의 두 딸(광주원부인, 소광주원부인)이 후비가 되었다. 이처럼 왕건은 전국의 호족 가문과 혼사를 맺었지만, 특히 중요한 몇몇 가문과 겹치기 혼사를 하여 좀 더 긴밀한 유대를 맺었고, 이들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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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자유혼이다. 이는 정략혼처럼 정식으로 혼인 의식을 치른 것도 아니고, 시침처럼 일방적으로 호족이 딸을 제공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왕건 자신이 여자를 취한 것으로 장화 왕후 오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장화왕후 오씨는 나주 사람으로 대대로 이 주(州)의 목포(木浦)에서 살았다. 일찍이 왕후(王后)의 꿈에 포구에서 용이 와서 뱃속으로 들어가므로 놀라 깨어 부모에게 이야기하니 부모도 기이하게 여겼다. 얼마 후에 태조가 수군(水軍) 장수로 나주를 지키는데, 배를 목포에 정박시키고 시냇물 위를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떠 있었다. 가서 본즉 왕후가 빨래하고 있으므로 태조가 그를 불러서 성관계를 맺었는데, 그녀의 가문이 보잘것없어 임신시키지 않으려고 피임 방법을 취하여 정액을 자리에 배설하였다. 왕후는 즉시 그것을 흡수하였고 드디어 임신이 되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혜종(惠宗)이다.

이처럼 이 시기 왕건의 혼인 유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고려 초 왕실 혼인의 특징과 의미를 짚어볼 수 있다. 우선 고려 초 왕실은 다처제였음을 알 수 있다. 후비의 호칭은 왕후와 부인으로 나뉘는데, 『고려사』 「백관지(百官志)」에 따르면 왕후는 적실(嫡室), 부인은 첩실(妾室)이라 한다. 태조의 후비 중 왕의 어머니인 태후를 포함해 왕후 호칭을 받은 사람이 무려 여섯 명이나 된다는 점에서 고려 왕실의 다처제를 알 수 있다. 다처제는 고구려와 신라의 왕실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지방 호족이던 왕건은 건국한 뒤 왕실의 다처 전통을 충분히 활용하여 호족 통합과 후삼국 통일을 달성했으며, 특히 신라 왕녀와 혼인하여 왕권의 신성화와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다른 특징으로 자매혼과 근친혼을 들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광주 호족 왕규는 두 딸을 태조 왕건에게 시집보냈고, 다시 딸 하나(후광주원부인)를 왕건의 아들인 혜종과 혼인시켰다. 박영규도 딸 하나는 태조, 두 딸(문공왕후(文恭王后), 문성왕후(文成王后))은 정종과 혼인시켰다. 혜종과 정종은 모두 자신의 이모와 혼인한 것이다. 한편, 태조 왕건은 왕실의 세력을 분산시키지 않기 위해 자식들을 이복 남매끼리 혼인시키기도 했고, 혜종은 그의 딸을 동생 소(뒤에 광종)에게 시집보냈다. 자매혼과 동성 근친혼은 고대 왕실에서도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동성 근친혼은 그 뒤 고려 왕실의 전통으로 굳어졌으며, 자매혼도 이자겸(李資謙)이 둘째 딸을 예종의 비로, 셋째와 넷째 딸을 예종의 아들 인종의 비로 들인 사례에서 보듯 고려 중기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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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후 복원도
고려 왕후 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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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 근친혼과 자매혼의 가장 큰 의미는 고려 초 왕실 세력의 범위를 정했다는 점이다. 고려의 왕족은 왕건과 여러 가문의 혼인, 그리고 그 뒤 왕실과 몇 가문의 거듭되는 혼인을 통하여 점차 그 범위가 확장되어 간다.92)태조와 혜종, 정종까지는 여러 호족 딸들과 혼인하며, 광종 때부터는 왕실혼에서 충주 유씨와 황주 황보씨의 연합 세력을 형성하고, 경종 이후 족내혼(族內婚) 경향은 더 강화되어 목종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현종 이후 족내혼과 족외혼(族外婚)이 병행되며 이성 후비(異姓后妃)의 비중이 커진다. 이는 제한된 왕족 집단끼리 혼인을 계속하다 보니 왕위 계승권을 갖는 인물이 제한되어 왕위가 단절될 위기에 이르렀고, 또 왕권은 강화되었지만 귀족 관료층의 소외로 이들의 불만이 컸기 때문이라 한다(정용숙, 『고려 왕실 족내혼 연구』, 새문사, 1988 참조). 지방 호족 왕건은 이처럼 다처제와 동성 근친혼, 자매혼이라는 기존 왕실의 혼인 전통을 그대로 계승해 새로운 왕족을 만들었으며, 왕권을 강화하고 신성화할 수 있었다. 그 뒤 고려의 왕권이 안정되고 제반 제도와 문물이 갖춰지면서 근친혼을 규제하기 시작하고, 왕실혼에서도 족내혼의 비중이 줄어들며 이성 후비(異姓后妃)와 혼인하는 비중이 높아진다. 그러나 고려 말까지 이러한 왕실혼의 특징은 계속되어 고려 왕실 문화의 한 특색이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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