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2장 혼인의 다원성과 국제성
  • 2. 혼인 풍속과 혼인 의례
  • 누구와 몇 살 때 혼인하는가?
  • 근친혼과 중혼·재혼
권순형

혼인의 대상에 대해 또 하나 언급할 것은 근친혼 문제이다. 앞서 왕실의 혼인 사례에서 근친혼이 행해졌음을 보았지만, 근친혼은 일반인 사이에서도 보편적이었다. 예컨대 고려 중기에도 당대 제일의 귀족 가문이라 할 수 있는 인주 이씨 집안의 이자량(李資諒)은 형제인 자인(資仁)의 딸과 혼인 하였다. 그러나 근친혼은 점차 규제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예교(禮敎)나 문물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지배층 스스로가 자신들의 특권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자신들과 비슷한 수준의 다른 집안과 혼인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귀족적 특권이 처가나 외가를 통해서도 주어졌으므로 다른 성씨 집안과 혼인을 하면 같은 집안사람끼리 혼인할 때에 비해 특권을 두 배로 누릴 수 있었다. 이는 고려 초에 비해 중기에 들면서 지배 가문이 어느 정도 확정되고 숫자가 늘어나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에 문종 때 처음으로 대공친(大功親, 4촌)끼리 혼인하면 그 자식이 관리가 될 수 없게 했고, 숙종 때에는 소공친(小功親, 6촌)까지 혼인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처럼 근친혼 금지법이 마련되기는 했지만 사실 그리 철저히 지켜지지는 않았다. 오랜 근친혼 전통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근친 간에 혼인했어도 관직에 나가는 것은 허용하되, 다만 승진에 제한을 둔다거나 요직에만 등용시키지 않은 예가 많이 보인다. 특히, 서민에게는 규제가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거나 관리가 될 수 없게 하는 것은 어차피 서민과는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처가 있는데 또 다른 처를 취한다거나, 남편이 있는데 또 다른 남편을 취하는 중혼(重婚)은 금지한 것 같다. 이는 다처를 취한 왕실과 다른 점이다. 간혹 무신 집권기의 최고 권력자 최충헌(崔忠獻)처럼 예외가 있기도 하다. 그는 장군 손홍윤을 죽인 뒤 그의 아내 임씨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사통(私通)했고, 강종의 서녀 왕씨를 부인으로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충헌은 자기 마음대로 왕을 즉위시키거나 폐위시키는 등 왕을 능가할 정도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일반화하기 어렵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이 새로 부인을 취하기 위해 전 부인과 이혼하는 사례를 볼 때 일부일처제가 보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혼인 대상으로 과부를 취할 수도 있었다. 여성의 재혼에는 어떤 법적· 도덕적인 제약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이혼녀나 과부가 재혼한 사례가 많이 보인다. 심지어 재혼녀가 왕비가 되기도 했다. 예컨대 문덕왕후 유씨(文德王后柳氏)는 광종의 딸로 처음에는 홍덕원군(弘德院君)에게 시집갔다가 뒤에 성종의 비가 되었다. 이처럼 여성의 재혼을 규제하지 않은 것은 정절을 남편 생전에 한하는 것으로 보는 고대 이래의 정절 관념이 이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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