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2장 혼인의 다원성과 국제성
  • 2. 혼인 풍속과 혼인 의례
  • 누구와 몇 살 때 혼인하는가?
  • 노처녀와 독신녀의 존재
권순형

혼인은 몇 살 때 하였을까? 고려시대에 여성은 보통 15∼16세에 혼인하였으나 24∼25세의 만혼(晩婚)도 있었다. 남자도 평균 20세를 넘고 있으며, 32세에 혼인한 사례도 있다. 이처럼 혼인 연령이 높은 이유는 혼인을 같은 계층끼리 하였고, 세밀하게 문벌을 따졌기 때문이다. 즉, 귀족 가문의 딸은 조건만 맞으면 10대에 혼인했지만 적합한 조건을 갖춘 상대를 찾지 못하면 20대를 훌쩍 넘기는 일도 많았다. 게다가 이 시기 승려 지망자가 많았다는 점도 배필을 구하는 데 어려움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묘지명(墓誌銘)을 보면 대부분의 귀족 가문에서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아들이 승려가 되었으며, 승려였다가 환속해 혼인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혼인 대상 성비의 불균형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남성의 혼인 연령을 높이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한편 남성은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서 귀족 가문에 편입되기도 하였는데, 이 경우에도 혼인이 늦어졌다. 앞서 예로 든 정목은 32세가 되어서야 혼인하였다.

아울러 불교에서 혼인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강조하지 않았다는 점과 순수한 부계 혈통으로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관념이 희박했던 점 등도 혼인 연령을 늦추는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혼인을 사적인 일로 간주해 신도들에게 혼인을 하라거나 독신으로 순결한 생활을 하라는 등의 강요를 하지 않는다.94)스리담마난다, 「결혼 산아 제한에 대한 불교의 입장」, 한국 여성 불교 연합회 편, 『불교의 여성론』, 불교시대사, 1993, 151쪽. 또 불교에서는 출생을 윤회설(輪廻說)이 바탕이 된 계층별 환생설(還生說)로 설명한다.95)허흥식, 「불교와 융합된 사회 구조」, 『고려 불교사 연구』, 일조각, 1996, 19쪽. 즉, 전생의 업보에 따라 현재의 신분별 존재가 생겼으며, 다시 현생의 업보로 내세의 존재가 규정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업보는 개인 것이므로 불교는 기본적으로 가족주의적이 아니라 개인주의적이다. 이 때문에 심지어는 독신으로 살다 죽은 여성들조차 있었다. 묘지명을 보면, 숙종의 셋째 왕자 왕효의 외손녀인 왕재(王梓)의 딸은 혼인을 하지 못하고 43세에 병으로 죽었다. 인종의 외손녀인 왕영(王瑛)의 딸 역시 혼인하지 않고 아버지를 정성으로 섬기며 불교를 독실하게 믿다가 36세에 병으로 죽었다. 이들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어 혹시 건강상 이유로 혼인하기 어려웠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왕족 여성이 주로 왕족 내에서 배우자를 구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선택의 범위가 좁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혼인을 하지 않고 사는 삶도 인정했던 불교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남성 독신자도 있었는데, 예종 때 관리 곽여(郭輿)가 대표적이다. 곽여의 생애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곽여는 어렸을 때부터 맵고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않았고 여러 아이와 같이 놀지도 않고 항상 자기 방에서 글공부에만 열중하였다. 과거에 급제해 벼슬하면서도 성 밖에 작은 암자를 짓고 틈만 나면 그곳에서 쉬었다. 예종이 태자 때부터 그를 알아, 즉위한 뒤 불러 궁궐에 머물게 했다. 뒤에 그가 은거할 것을 청하자 왕이 동편 교외 약두산 봉우리에 거처할 집을 꾸려 주었다. 그는 책을 많이 읽었고, 심지어는 도교·불교·의학·약학·음양설에 관한 서적까지 모두 독파했으며, 또 한 번 보기만 하면 암기하고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궁술·기마·음률·바둑 등 해 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72세에 죽었으나 평생 혼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임지의 기생을 서울로 데려오기도 했고, 산재(山齋)에도 비첩(婢妾)이 있어 여론이 좋지 않았다.96)『고려사』 권96, 열전10, 곽상 부 곽여.

즉, 곽여는 어릴 때부터 마늘이나 파같이 불교에서 금하는 오신채(五辛菜)를 먹지 않는 불교적 성향을 보였고, 이는 성인이 된 뒤에도 계속되었다. 그는 평생 혼인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자유롭게 살았다. 이는 고려가 불교를 숭상했고, 부계 혈통으로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의식이 없던 시대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곽여 같은 사례는 더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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