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2장 혼인의 다원성과 국제성
  • 2. 혼인 풍속과 혼인 의례
  • 시집에 가지 않는 여자
권순형

혼인한 뒤 여성들은 어디에서 살았을까? 고려의 혼인 풍속을 일반적으로 서류부가혼(婿留婦家婚)이라 한다. 이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또는 솔서제(率婿制)라고도 부르는데, 여성들이 혼인을 하고도 친정에서 계속 살다가 나중에 시집으로 가는 처가살이 풍습이다. 이곡(李穀)은 원나라에 올린 공녀(貢女) 폐지 상소문에서 “남자가 차라리 본가에서 따로 살지언정 여자는 집을 떠나지 않는 게 고려 풍속이다.”이라고 하였다. 남자가 처가에 머무는 기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혼례를 처가에서 올리고 계속 처가에서 거주하다가 나중에 자기 집으로 가기도 하고, 처가에 있다가 벼슬 등을 이유로 분가하기도 했으며, 자기 집이나 제3의 장소에서 살다가 나중에 처가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장인·장모를 부양하기도 했다. 또 무남독녀(無男獨女)는 거의 친정에서 살기도 했다.

여흥군(驪興郡)부인 민씨(閔氏)는 고려 말 문신 민사평(閔思平)과 언양군부인 김씨의 무남독녀로 신라 경순왕의 18세손 김묘(金昴)와 혼인하여 3남 9녀를 낳았다. 그녀의 장남 제민(齊閔. 혹은 九容)은 이색과 친구로 함께 성균관에 있었다. 제민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난 여가에 매일 조용한 곳에 가서 시를 썼는데, 한더위에도 중단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색은, “그가 외가에서 나서 자라 외조부를 알고 사모함이 깊었고, 성품이 문묵(文墨)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처럼 태만하지 않은 것 같다.”고 언급하였다. 또 제민은 외조모의 묘지명을 이색에게 부탁하면서 외조모가 늘 손녀들에게 “남편 섬기는 예는 오직 공경하는 마음 하나로만 할 것이며, 의복과 음식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정결하게 하되 오직 그 때에 알맞도록 하면 될 것이다.”라고 가르쳤음을 술회하였다.97)김용선 편, 『역주 고려 묘지명 집성』 하, 민사평 처 김씨 묘지명,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2001, 1026쪽. 즉 제민의 어머니는 자식들과 함께 친정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녀는 1361년에 홍건적을 피해 영남으로 피난할 때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가 어머니가 여흥에 머물자 함께 살며 잘 섬겼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녀의 아들과 사위가 서울로 올 것을 청했으나 서울로 가면 어머니 무덤에 성묘하지 못한다며 떠나지 않았다.98)김용선 편, 『역주 고려 묘지명 집성』 하, 김묘 처 민씨 묘지명,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2001, 1067쪽.

반면 최루백(崔婁伯)의 처 염경애(廉瓊愛)는 “출가하기 전에는 부모를 잘 섬겼고 시집온 뒤에는 홀시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했다.”99)김용선 편, 『역주 고려 묘지명 집성』 상, 최루백 처 염경애 묘지명,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2001, 135쪽. 한다. 그녀의 시집은 수원 향리 집안으로 시아버지는 호랑이에게 죽임을 당했고, 그녀의 남편 최루백은 그 호랑이를 잡아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효자였다.100)『고려사』 권121, 열전34, 효우, 최루백. 최루백은 과거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했다. 당시 관리들이 개경에 거주했으므로 최루백은 처와 홀어머니를 개경으로 모셔와 함께 지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혼인 뒤 거주 형태는 가족 구성이나 직장·경제력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일률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집살이는 의무가 아니어서, 여자 집에서 혼례를 올리고 머물며 여러 가지 형편을 고려한 뒤 거주를 결정했다.

처가에 머무는 기간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처가살이가 기본이다 보니 고려시대에는 처가나 외가와 관계가 매우 밀접했다. 전근대시대 친족의 멀고 가까움은 상복제(喪服制)에서 잘 나타나는데, 고려에서는 외조부모나 장인·장모의 상복이 모두 1년으로 친조부모와 같았다. 중국이 친조부모는 1년, 외조부모는 5개월, 장인·장모는 3개월인 것과 비교할 때 사이가 더 가까웠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사위나 외손자는 아들이나 친손자와 마찬가지로 장인이나 외조부를 통해 음서(蔭敍) 공음전(功蔭田) 특혜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사위가 국가에 공을 세우면 사위의 부모와 함께 장 인·장모도 상을 받았고, 사위가 죄를 지으면 장인 역시 연좌(緣坐)되었다. 거꾸로 장인이 공을 세웠거나 죄를 지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혼인과 가족 제도 아래에서 여성의 삶은 어떠했을까? 우선 여성은 혼인한 뒤 꼭 시집에 갈 필요가 없고 친정 부모를 모실 수도 있었으니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관념이 적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편과의 관계도 시집에 들어가 살 때에 비해서는 덜 일방적이었을 것이다. 이에 정도전(鄭道傳)은 여자들이 친정에서 혼인 생활을 하기 때문에 자기 부모 세력을 믿고 남편을 무시하고 교만하게 군다며, 혼인 풍속을 중국처럼 시집살이 형태로 바꾸자고 주장할 정도였다.101)『삼봉집(三峰集)』 권7,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상, 예전(禮典) 혼인. 게다가 여성들은 혼인 뒤에 친정 부모를 모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제사까지도 지낼 수 있었다. 고려의 제사 풍속은 집에서 가묘(家廟)를 세우고 적장자가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절에서 재(齋)를 지내는 형태였기 때문에 형제자매가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시는 윤행(輪行)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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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귀부인 복원도
고려 귀부인 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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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고려시대에는 딸도 아들 못지않은 소임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남녀 차별도 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식을 호적에 기재할 때도 아들 먼저 쓰고 딸을 나중에 기재하는 것이 아니라 출생 순서대로 기재하였다. 또한 장성한 아들이 있어도 어머니가 호주가 되기도 하였다. 『여주이씨소릉공파보』에 실려 있는 낙랑군부인 최씨 호구 자료는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 준다. 자료에 따르면 최씨는 경주 사람으로 여주 이씨 집안에 시집왔 다. 호구 자료에는 그녀가 호주(戶主)로 기재되고, 그녀의 부·조·증조·외조가 실려 있다. 남편의 부·조·증조·외조 역시 기록되어 있으며, 남편은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자식으로 32세, 28세, 24세, 19세 아들이 관직명과 함께 등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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