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2장 혼인의 다원성과 국제성
  • 2. 혼인 풍속과 혼인 의례
  • 혼인의 절차와 혼수품
권순형

혼인 의례에 대한 기록은 왕실을 제외하고는 찾기가 쉽지 않다. 『고려사』 「예지」에는 왕실의 혼인 의례가 실려 있는데, 절차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혼인 대상이 결정되면 신부 집에 혼인을 청하고(납채), 혼인 날짜를 정해(택일) 사신을 보내 알린다. 태묘에도 왕태자가 혼인하게 되었음을 고한다. 신부 집에서는 혼서(婚書)를 받은 뒤 사례하는 표를 올린다. 조선시대처럼 나라 전체에 금혼령을 내리고 대대적으로 간택하지 않고, 적당한 인물을 물색해 결정한 것 같다. 신부 집에 혼인의 징표로 예물을 보내는 납폐(納幣)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 의하면 충선왕이 세자 시절 진왕(晉王)의 딸 보탑실련공주(寶塔實憐公主)와 혼인할 때 황제와 태후, 진왕에게 각각 백마 81필씩을 폐백으로 바쳤다. 우왕이 최영(崔瑩)의 딸과 혼인할 때에도 최영에게 말을 주고, 최영은 왕에게 안마(鞍馬)와 의대(衣帶)를 바쳤다.

그 다음에는 혼례를 치르는데, 이를 위해 신랑이 신부 집으로 신부를 데리러 가는 것이 친영(親迎)이다. 친영하는 날 태자비의 임시 휴게소를 여정궁 합문 안에 정하고, 신하를 태자비의 집으로 보내 맞아오게 한다. 태자비가 궁으로 들어오면 태자비와 태자는 서로 인사하고 침실로 들어간다. 태자와 비는 한 방에 들어 합환주(合歡酒)를 나누는 동뢰(同牢) 의식을 치른다. 혼례한 뒤 3일째 되는 날에 태자비는 일찍 일어나 성장(盛裝)하고, 왕궁 의 내전과 왕후 앞으로 가서 배알하는데, 이를 ‘비조배(妃朝拜)’라고 한다. 이때 왕과 왕후가 비에게 단술(醴)을 주고 난 뒤 왕은 태자비로 책봉한다.

이처럼 왕실에서는 중국식 혼인 의례가 치러졌는데, 일반인은 어떠했을까? 우선 혼인 결정은 당사자의 의사보다는 부모가 주도하는 중매가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부모의 지시 없이 혼인하는 것을 금했으며,102)『고려사』 권85, 지39, 형법2, 금령. 양천혼같이 불법적인 혼인을 하면 부모가 주혼자(主婚者)로서 처벌되었다. 『고려도경』에 “귀족이나 벼슬아치 집안에서는 혼인할 때 예물은 주로 비단을 쓰나(用聘幣) 서민들은 술과 쌀을 서로 보낼 뿐이다.”라고 나오는 것을 보면 납폐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친영은 행하지 않았다. 고려의 혼인 풍속이 서류부가혼으로 처가에서 혼례를 올리므로 친영 절차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혼수품이나 혼인 비용은 어떠했을까? 무신 집권기 최고 권력자 최충헌의 동생 충수는 자기 딸을 태자비로 삼기 위해 기존의 태자비를 강제로 이혼시켰다. 그러고는 혼인날을 잡으면서 장인(匠人)을 데려다가 장구(裝具)를 크게 준비했다.103)『고려사』 권129, 열전42, 반역3, 최충헌. 여기서 혼수에 가구 같은 것이 포함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의복이나 그릇(器皿), 노비도 필요했으며,104)『세종실록』 권50, 세종 12년 12월 무자. 경대와 화장용구 등도 소용(所用)되었다.105)『고려사』 권129, 열전42, 반역3, 최충헌 부 최항. 한편, 혼례에 사치가 얼마나 심했는지 『고려사』 「형법지」 금령조를 보면 혼수로, 금은으로 만든 그릇이나 비단 등을 사용하지 못하게 여러 차례 금지령이 내려졌다. 또 공양왕 때에는 민가에서 비단금침 등 값비싼 혼수와 의복을 갖추지 못해 혼기를 놓치는 일이 왕왕 있다며, 오직 무명만 사용하고 외국 물건은 일절 금하자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했다. 혼례 때의 잔치도 화려하기 짝이 없어 대궐에서나 쓰는 붉고 큰 초(紅大燭)를 사용하고, 비단으로 꽃을 만들어 장식했다. 또 곡식을 흙과 모래처럼 쓰며, 기름과 꿀을 구정물같이 낭비해 유밀과(油密果)를 만들 정도여서, 이에 국가에서는 유밀과 대신 과실을 쓰게 하고, 반찬 가짓수도 줄이라고 조치하기도 했다.

이처럼 혼인 비용이 많이 들었을 뿐 아니라 사위를 처가에서 데리고 살려면 처가의 경제적 능력이 필요하였으므로 신부의 혼인 부담은 상당했을 것이다. 이규보(李奎報)는 자신의 문집에서 “예전의 친영은 부인이 남편 집으로 시집오므로 처가에 의뢰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처를 취함에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니 무릇 자기가 필요한 것을 다 처가에 의거하여 장인·장모의 은혜가 부모의 은혜와 같다.”고 했다. 이 때문에 경제적 능력이 없어 혼인하지 못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고려사』에 보면, 종실 왕선(王璿)은 물욕이 적어 불교만 독실하게 믿고 생업을 돌보지 않았다. 그는 1216년(고종 3)에 죽었는데, 딸이 둘 있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시집보내지 못했고 자신의 장례조차 지내지 못하니, 최충헌이 왕에게 보고해 관비(官費)로 장사를 치러 주게 했다. 또 충선왕 때의 관리 김지숙(金之淑)은 내직과 외직 벼슬을 역임하였는데, 어디서나 공적을 남기고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성품이 청렴하고 강직해 가세가 빈곤하여 딸 둘이 있었으나 출가하지 못하고 여승이 되었다. 이러한 예는 모두 고려시대에 여자가 부담해야 할 혼인 비용이 매우 많았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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