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2장 혼인의 다원성과 국제성
  • 3. 국제혼과 문화 교류
  • 대외 개방과 국제혼
  • 후삼국인과 발해인 간의 혼인
권순형

고려 초의 국제혼은 우선 후삼국인과 발해인 사이의 혼인을 들 수 있다. 혼인을 통한 후삼국의 통일은 태조 왕건에 그치지 않았다. 『고려사』에 보면 태조는 귀순해 오는 호족들을 자신의 측근과 혼인 관계를 맺게 했다. 예컨대 강주 장군 윤웅(閏雄)이 아들 일강(一康)을 인질로 보내자 태조는 일강에게 아찬 품계를 주고 경(卿) 행훈(行訓)의 누이동생과 혼인하게 했다. 또한 태조가 벽진군의 호족 이총언에게 사신을 보내 협력을 요청하자 이총언은 아들 영(永)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게 했다. 당시 영은 18세였는데, 태조는 그를 대광 사도귀(思道貴)의 딸과 혼인시켰다. 이처럼 왕건은 물론 각 지역 호족 간의 혼인으로 후삼국의 통합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한편 발해 유민과도 혼인하였는데, 태조는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발해 유민을 무제한으로 받아들였다. 유민에는 왕자 대광현(大光顯)이 수만 명을 거느리고 항복해 온 것을 비롯해 고급 관리나 학자·장군 등 지배층 인사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려에서는 대광현에게 왕계(王繼)라는 이름을 내려 주고 왕족에 편입시켰으며, 원보(元甫)를 제수하고, 휘하 군사와 신료들에게도 토지와 가옥을 내려 주는 등 후대(厚待)하였다. 『요사(遼史)』에 보면 고모한(高模翰)에 대한 기록이 있다. 고모한은 태조 왕건의 딸과 혼인했는데, 죄를 짓고 거란으로 도망했다가 거란 태조에게 발탁되어 장군으로 활약했다. 이 사례에서 보듯 귀화한 발해 지배층과 고려 왕실 내지 지배층의 혼인도 제법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발해 왕실 성씨인 대씨가 이후에도 『고려사』에서 보이는 점106)예컨대 최이(崔怡)의 장인에 대집성(大集成)이 있으며(『고려사』 권129, 열전 최이), 고종 때 몽고와 치른 전쟁에서 군공을 세운 인물로 대금취(大金就)가 있다(『고려사』 권24, 세가24, 고종 40년 8월 계축).이 이를 말해 준다. 후삼국과 발해의 혼인으로 고려의 민족 융합은 한층 진전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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