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2장 혼인의 다원성과 국제성
  • 3. 국제혼과 문화 교류
  • 대외 개방과 국제혼
  • 송·거란·여진인과의 통혼
권순형

고려는 송나라나 거란·여진 등과도 활발하게 교류했으며, 이들 나라로부터의 귀화인도 많았다. 한인(漢人)들은 919년(태조 2) 오월국의 문사 추언규(酋彦規)를 시작으로 1148년(의종 2)까지 여러 나라에서 42회에 걸쳐 155명이 귀화했다. 『고려사』 초기 기록이 간략한 점을 고려하면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았으리라 추정한다.107)박옥걸, 「고려 초기 귀화 한인에 대하여」, 『국사관논총』 39, 1992, 116∼117쪽. 이들 가운데 가장 많은 계층은 문인·문사·진사·관인 등 지식인 부류였고, 이 밖에 상인·악인·악공·역어·승려·의인·무인 등 다양했다. 귀화한 동기는 난을 피하기 위한 망명적(亡命的) 성격도 있었으나 개인적으로 출세할 목적도 있었다. 고려 초에 후삼국의 통일을 주도한 세력은 거의 무장 출신으로 문한(文翰)을 담당할 사람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이들을 우대했기 때문이다.108)박옥걸, 앞의 글, 121∼127쪽. 고려 정부에서는 이들에게 관직을 주고, 토지나 가옥, 물건을 내려 주었다. 특히 광종은 투화(投化)한 한인을 후대하여 신료(臣僚)들의 가옥을 징발하고 딸을 골라 혼인시켰다. 활약이 컸던 귀화인으로는 과거제 실시에 기여한 후주(後周) 사람 쌍기(雙冀), 외교 문서의 초안이 그의 손에서 많이 작성되었으므로 고려 왕조에서 비할 바 없는 우대를 받았다는 송나라 사람 주저(周佇)를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한인들은 문한과 외교·통역·무역·의약·음악·통역·점술 등 여러 가지 방면에서 활약해 고려 전기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한편 송나라는 당나라의 정책을 계승하여 무역 진흥을 도모하고, 개국 초부터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기 위한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중상주의(重商主義)를 택했다. 이에 상업이 크게 발달하고, 여러 나라와 교역도 활발했다. 고려와 송나라의 무역 역시 확대되었으며, 송나라 상인을 따라 아라비아나 남양(南洋) 여러 나라의 상인들까지 고려에 와서 상행위를 했다. 이에 고려의 무역항 벽란도는 크게 붐볐고, 『고려사』 「악지」에 나오는 작품 ‘예성강곡’의 유래에서 보듯 중국 상인과 고려 여인이 혼인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거란과의 관계는 초기에는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라 하여 적대하였으나 그 뒤 관계가 개선되어 성종 때는 동경 유수 부마 소항덕(蕭恒德)의 딸과 국혼(國婚)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숙종 이후 30년 동안 거란과 싸움하는 과정에서 많은 거란인이 포로로 고려에 들어와 있었고, 또 거란의 정국이 혼란한 틈을 타고 많은 거란인이 항복해 와 예종 때는 귀화인의 수가 몇 만에 달했다. 이들은 대개 천인(賤人)에 속해 집단적으로 거주하며 자신들이 지닌 각종 기술로 생업에 종사했다. 또한 여진족이 항복해 오기도 했다. 문종 때 여진족 야읍간은 동북면에 와서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형 등 여섯 명이 이미 고려에 귀순했으니 자신도 그들과 함께 살고 싶다고 간청했다. 왕은 “그들이 예절은 모를지언정 그래도 부모에 대한 효성이 있으니 부모 친척을 따라 와서 같이 살도록 하고 영남 지방으로 이주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들 거란인·여진인과 고려인 간의 통혼도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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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폭원도(松都幅員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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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고려 전기에는 후삼국 및 발해인과의 통혼을 통해 실질적인 민 족 통합을 이루고, 한인과 거란인·여진인의 귀화 및 이들과의 혼인을 통해 한층 다양하고 폭넓은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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