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2장 혼인의 다원성과 국제성
  • 4. 고려 가요의 남녀상열지사
  • 고려의 정절 의식과 간통죄
권순형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란 조선시대에 들어와 고려 속요(高麗俗謠)들이 『악장가사(樂章歌詞)』나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등에 실릴 때, 가사의 내용에 대해 조선시대 사람들이 평한 말이다. 남녀 간의 사랑이 매우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어 그 가사대로라면 고려시대는 성적으로 매우 자유분방한 사회였던 듯 느껴진다. 그러나 앞서 혼인에 대해 고찰한 바로는 혼인이 부모의 중매로 결정되는 등 연애와는 전혀 거리가 먼 시대인 것 같기도 하다. 과연 고려시대 남녀 간의 사랑은 어땠을까?

고려시대에는 내외법(內外法)이 없었고 연등회·팔관회 등의 명절과 불교와 토속 신앙의 의례들이 야외에서 집단으로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또 남녀노소가 함께 참여하는 향도회(香徒會) 등도 있어서 남녀가 눈을 맞출 기회가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연애 사건도 꽤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의 사례도 신라 말 고려 초의 자유분방한 남녀의 만남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 충렬왕 때의 관리 허공(許珙)의 사례도 있다. 허공이 일찍이 달밤에 거문고를 타고 있었는데, 이웃집 처녀가 담장을 뛰어넘어 왔다. 허공이 가까이하지 않고 예의에 어긋난 짓임을 타일렀더니 여자가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면서 돌아갔다. 이 밖에도 연애 사건은 많았을 것이나, 미혼 남녀의 연애는 법에 저촉되는 것이 아니어서 실제 사료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고려사』에는 법에 따라 처벌받은 과부의 연애사가 더 많다.

목종의 모후인 헌애왕태후 황보씨는 외가 친족인 김치양(金致陽)과 간통하여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왕위 계승자로 정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녀의 자매인 헌정왕후 황보씨는 남편인 경종이 죽자 대궐에서 나와서 기거했다. 당시 종친인 안종(安宗)의 집이 가까웠으므로 그녀는 자주 왕래하다가 간통하여 임신했다. 후기에도 과부와 관련된 연애사가 있다. 김태현(金台鉉)은 용모가 단정하고 눈매가 그린 듯했다. 일찍이 동무들과 함께 선배의 집에 가서 공부했는데, 선배가 그를 매우 사랑하여 가끔 데리고 들어가 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다. 그 집에는 과부가 된 딸이 있었는데, 시를 약간 이해했다. 어느 날 그 딸이 시를 지어 창틈으로 던져 주었다.

말 탄 소년의 얼굴 깨끗하기도 하이

석 달 동안 누구신지 이름 몰랐네

이제야 알고 보니 김태현이란다

가는 눈, 긴 눈썹 은근히 마음에 들어요.

김태현은 이 시를 읽고 그 집에 발을 끊고 가지 않았다 한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에는 정절 관념이 없었을까? 이 시대 사람들의 정절 의식을 잘 보여 주는 것이 다음의 사료이다.

어사대에서 황상·양백연이 판밀직 신귀의 처 강씨와 간통한 사실을 탄핵하니 경복흥(慶㚆興)이 말하기를 “강씨가 절개를 잃은 것은 지아비 가 유배되어 한가함을 막지 못한 때문입니다. 병신년(1356, 공민왕 5) 이후 유배되고 귀양 간 자가 실로 많아 안사람들이 원망하여 절개를 잃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을 모두 석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라 하니 그의 말을 따랐다.117)『고려사』 권111, 열전24, 경복흥.

앞의 내용은 공민왕 때 부원 세력인 기철 일당이 제거되는 등 정치적 격변 속에서 처벌된 자에게 관용을 베풀어 정치적 통합을 이루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편으로 고려시대 정조에 대한 관념을 엿볼 수 있다. 경복흥은 ‘강씨 부인이 절개를 잃은 것은 지아비가 유배되어 한가함을 막지 못한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즉,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는 여성이 바람을 피울 수도 있다는 당시 사람들의 관념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고려사』를 보면 과부나 홀아비가 되기를 기다려 연애를 하는 사건이 꽤 있었다. 예컨대 충렬왕 때 대장군이던 김혼(金琿)은 상장군 김문비(金文庇)와 친하게 지냈다. 하루는 김문비의 집에 가서 바둑을 두는데, 문비의 처 박씨가 문틈으로 몰래 엿보고 김혼의 아름다움과 장대함을 감탄했다. 김혼이 그 소리를 듣고는 그녀에게 뜻을 두었다. 얼마 되지 않아 김문비가 죽고 김혼의 처도 죽었다. 박씨가 사람을 보내 “첩은 아이가 없으니 그대의 아들 한 명을 얻어 기르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했다. 또 “직접 뵙고 할 말이 있으니 한 번 오시기 바랍니다.”라고도 했다. 김혼은 그녀에게 갔고, 둘은 사랑을 시작했다. 이 밖에도 정중부(鄭仲夫)의 딸이나 조석견(趙碩堅)의 처 장씨 등 과부가 된 뒤 간통을 꾀하는 여성들의 사례가 여럿 보인다. 이는 배우자가 생존해 있을 때만 정조를 지키면 된다는 고대 사회의 정절 의식이 고려시대까지도 계속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는 고대 사회에 비해 혼인 관련 법이나 제도 등이 훨씬 정비된 사회였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간통으로 처벌되었다. 점점 자유로운 연애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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