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2장 혼인의 다원성과 국제성
  • 4. 고려 가요의 남녀상열지사
  • 임과 나와 얼어 죽을망정, 정 둔 오늘밤 더디 새오시라
권순형

고려 속요에는 연애가 어떻게 표현되어 있을까? 우선 부부애를 들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조혼이 많았기 때문에, 특히 여성은 남편이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인 경우가 많았다.

부부애를 보여 주는 작품으로는 「원흥(元興)」과 「거사련(居士戀)」이 있다. 「원흥」은 화녕부 속읍 원흥진의 부인들이 장사하러 떠났던 남편들이 탄 배가 돌아오면 기뻐하며 불렀던 노래이다. 「거사련」은 객지에 나간 사람의 처가 까치와 거미를 빌려 남편이 돌아오기를 바란 것이다. 이제현(李齊賢)이 시를 지어 노래를 풀이했다.

까치가 울 안 꽃나무 가지에서 지저귀고

거미가 침상에 줄을 늘이니

우리 님 오실 날이 멀지 않기에

그 정신이 먼저 사람에게 알리누나.

남자들은 부인 외에도 기녀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었는데, 이 때문에 본부인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고려사』 「악지」에는 ‘월정화(月精花)’라는 노래의 유래가 실려 있다. 월정화는 진주의 기녀였는데, 사록(司錄) 위제만(魏齊萬)이 그녀에게 매혹되었다. 부인은 울분으로 병이 나서 그만 죽어 버렸다. 고을 사람들이 이를 불쌍히 여겨 부인이 생존하였을 때에 서로 친애하지 않았던 사실을 들어 사록이 여색에 빠진 것을 풍자했다.

당시 기녀들은 미모와 교양으로 남성들의 사랑을 받았고, 여염집 여성과는 달리 자유롭게 연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녀인 동인홍(動人紅)은 「자서(自敍)」라는 시에서 그녀들이 절개를 지키기가 쉽지 않았음을 표현하였다.

좋은 집 따님과 기생의 사이

그 마음 사이가 얼마나 다를까

가엾다 백주(柏舟)의 굳은 절개여

두 마음 안 품기로 맹세했나니.118)최자(崔滋), 『보한집(補閑集)』 하.

‘백주’는 『시경』의 편명으로 공강(共姜)이 어머니에게 재가를 강요당했으나 죽음으로 이를 거절한 내용이다. 동인홍도 절개를 지키겠다고 맹세하며 이 글을 썼으나, 이를 통해 오히려 당시 사회에서 기녀가 지조를 지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준다.119)이경복, 『고려시대 기녀 연구』, 민족 문화 문고 간행회, 1985, 117쪽. 기녀의 사랑은 이별이 전제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유명한 고려 가요 「가시리」와 「서경별곡(西京別曲)」, 「동동(動動)」,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 등이 모두 이별을 소재로 하였다. 「만전춘별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 그대로 남녀상열지사의 진수를 읊었다.

어름우희 댓닙자리 보와 (얼음 위에 댓닢자리를 보아)

님과 나와 어러주글만뎡 (임과 나와 얼어죽을망정)

어름우희 댓닙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주글만뎡

정(情)둔 오범 (정을 준 오늘밤)

더듸 새오시라 더듸 새오시라 (더디 새어라 더디 새어라)

(2, 3, 4연 생략)

남산(南山)에 자리 보와 (남산에 자리 보아)

옥산(玉山)을 벼여 누어 (옥산을 베고 누워)

금슈산(錦繡山) 니블 안해 (금수산 이불 안에)

사향(麝香)각시를 아나 누어 (사향 각시를 안고 누워)

약(藥)든 가을 맛초사이다 맛초사이다

(사향이 든 가슴을 맞춥시다 맞춥시다)

아소 님하 원대평생(遠大平生)애 여힐모새

(알아주소서 임이시여 영원히 이별할 줄 모르고 지냅시다)

즉, 얼음 위에 대자리를 깔고 누울 정도의 혹독한 상황이라도 임과 함께라면 감내할 수 있다는 뜨거운 열정을 보여 준다. 그러나 임은 떠나고 임에 대한 원망도 해 보지만(2, 3, 4연) 다시금 “남산에 자리 펴고 옥산을 베고 누워, 비단이불 안에 아름다운 여인을 안고 누워, 향낭이 든 가슴을 맞추며 평생토록 여읠 줄 모르고 지내십시다.”라며 임과 함께 영원히 합일하기를 기원하였다.

떠나는 임에 대한 절절한 사랑은 「서경별곡」에서도 보인다.

구스리 바회예 디신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긴힛  그츠리잇가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

즈믄를 외오곰 녀신 (천년을 외따로 살아간들)

신(信)잇 그츠리잇가 (믿음이야 없어지겠습니까)

한편 고려시대에는 상업과 무역이 발달해 예성강에는 송나라·거란·여진 외에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들락거렸다. 강가에는 주식점(酒食店)과 기녀가 있는 술집 등이 밀집해 있었고, 이곳에서 외국인과 고려 여인과의 슬픈 사랑과 이별 역시 적지 않게 있었을 것이다. 『고려사』 「악지」의 ‘예성강곡’은 바로 이와 관련된 노래이다. 중국 상인 하두강(賀頭綱)이 바둑을 잘 두었는데, 일찍이 예성강에 이르렀을 때 한 아름다운 부인을 만났다. 그는 부인의 남편과 돈 내기 바둑을 시작했다. 거짓으로 바둑을 지고 곱 으로 주니 남편이 열중해 결국은 자기 처를 걸었다. 이때 두강이 단번에 바둑을 이기고 그의 처를 배에 싣고 갔다. 그래서 남편이 후회하고 한탄하며 이 노래를 지었다 한다. 그러나 부인이 갈 때 옷매무새를 견고히 해 하두강이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없었다. 바다로 들어섰을 무렵에 뱃머리가 돌고 가지 않았다. 점을 치자 ‘정절 있는 부녀가 신명을 감동시킨 탓이라 그 부인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반드시 파선되리라.’는 점괘가 나왔으므로 뱃사람들이 두려워하며 하두강에게 권고해 부인을 돌려보냈다. 그 부인도 노래를 지었는데, 후편이 그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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