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은 둘째 딸 정경궁주를 조준(趙浚)의 아들 대림에게 시집보낼 때 어려움을 겪었다. 때마침 대림이 모친상을 당한 지 겨우 4개월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간원에서는 복을 마치기를 기다려 혼인하는 것이 예에 맞는다고 건의했다. 그러자 태종은 상을 마치기를 기다리는 것이 예인 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조선과 혼인할 뜻이 있다는 중국 황제의 전언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의 처지를 설명했다. 결국 태종은 사간원의 논의가 합당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혼인을 강행했다. 이처럼 상중에 혼인하는 것은 매우 불경한 일로 인식되었다. 상중인 남자들은 혼인이 아니라 여묘살이를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