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3장 정비된 혼인, 일탈된 성
  • 1. 올바른 혼인
  •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혼인인가
  •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버리지 않는다
이순구

태종이 정복주(鄭復周)를 폐하여 서민으로 만들었다. 1406년(태종 6) 사헌부에서 상언하기를, “이달 초엿새에 전 첨절제사 정복주는 본처를 버리 고 화산군(花山君) 장사길(張思吉)의 기생첩 복덕(福德)의 딸에게 장가들어 혼례를 하고 후처로 삼았습니다. 정복주는 여러 벼슬을 거쳐 품계가 3품에 이르렀으니 혼례를 모르지 않을 터인데, 제멋대로 행하여 선비의 기풍(氣風)에 누를 끼쳤습니다. 바라건대 직첩(職牒)을 거두고 법률에 따라 논죄해서 풍속을 바루소서.”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정복주는 나와 나이가 같으니 지금 이미 늙었다. 그런데 조강지처를 버리고 천인을 얻어 자기 배필을 삼았으니 가증스럽지 않은가? 만일 폐하여 서민을 삼으면, 복덕과는 신분이 맞아 그녀의 사위가 될 만도 하겠다.” 하고, 곧 명하여 삭직(削職)하고 서민으로 만들었다.128)『태종실록』 권12, 태종 6년 12월 갑진.

조강지처를 버렸다고 해서 늘 정복주처럼 처벌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당시 사람들은 조강지처를 이유 없이 버리는 것은 도덕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종자(宗子)의 권위는 항상 종부(宗婦)와 짝해야만 완결성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종부 또는 부인은 가문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존재이고, 그러한 가문에 바탕을 두고 사회를 운영해야 하는 조선으로서는 조강지처, 즉 정식 부인의 위치를 보장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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