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 6월 28일 이후에 양인(良人) 남편에게 시집가서 낳은 공사(公私) 비(婢)들의 소생은 경술년 가을부터 3년마다 한 차례씩 조사하여 장적(帳籍)을 만들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사천(私賤)인 경우 그들 주인은 비 소생을 천인으로 만들려고 (비가) 기한 전에 시집갔다고 주장하고, 반대로 그 양인 남편과 비들은 자신의 아이들은 양인이 되게 하려고 스스로 기한 후에 시집갔다고 말하면서 서로 고소하고 있습니다. 심한 자는 그의 남편을 남편으로 하지 않고, 천부(賤夫)에게서 난 소생을 양부(良夫) 소생이라 고쳐 이르는가 하면, 그 본래의 주인은 또 양부의 소생까지도 오히려 천부의 소생이라 일컬으며, 서로 다투고 거짓으로 꾸며 대면서 부자(父子)를 바꾸고 있으니, 그 옳고 그름을 알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윤상(倫常)을 상하게 하고 풍속을 무너뜨림이 이에서 더 심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이와 같은 고소가 있으면, 이를 관장하는 도관(都官)에 보내어 명백히 분별 한 뒤에 장적을 만들도록 하고, 또 유사(攸司)에 송치하여 깊이 징계하여 뒷사람을 감계(鑑戒)하도록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132)『세종실록』 권21, 세종 13년 1월 경오.
국가는 국역을 확보하기 위해 양인이 줄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양인이 노비와 혼인하여 그 소생이 다시 노비가 되는 것은 국가 양역(良役)에 손실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가 양인의 혼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즉 이들에게 바라는 바람직한 혼인은 신분이 서로 혼효되지 않아서 국익에 손해가 되지 않는 것에 집중되어 있을 뿐이었다. 친영을 하고 예를 갖추는 혼인은 양인 이하의 사람들에게는 애초에 요구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