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3장 정비된 혼인, 일탈된 성
  • 1. 올바른 혼인
  • 부부 관계
  • 투기한 사례
이순구

조선시대 부부의 최대 갈등 요소는 역시 남자 쪽의 여자 관계였다. 첩을 들이는 문제, 기생과 어울리는 것, 비를 취하는 것 등은 일반적으로 부인에게 인내를 요하는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기생에 대한 정처(正妻)의 투기 사례를 보자. 16세기 중반 이문건의 처 김씨 부인의 질투는 유난하다. 1552년(명종 7) 겨울 이문건이 58세 되던 해에 부인 김씨는 종대(終代)라는 기생과 남편 사이를 의심해 꽤 긴 기간(두어 달)을 두고 남편을 추궁하였다.

부인이 밤새 해인사 숙소에서 이상한 일이 없었는지 자세히 물었다. 기생이 방에 있었다고 말한 까닭에 부인이 크게 화를 내며 꾸짖었다. 아침이 되자 베개와 이불 등을 모아 칼로 찢고 불에 태웠다. 그리고 두 끼를 먹지 않고 종일 질투하며 꾸짖으니 염증이 난다.

당(堂)에 들어가 처를 만났는데, 처가 크게 화내고 질투하며 말하기를 “멀지도 않은 곳인데, 어떻게 밤에 돌아오지 않고 기생을 끼고 남의 집을 빌려 잘 수 있습니까? 이것이 어찌 노인이 할 일입니까? 제가 상심해서 자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습니까?” 꾸짖는 것이 너무 심하니 몹시 귀에 거슬려서 나 또한 대답이 부드러울 수 없었다. 서로 격해져서 더욱 어긋나니 다시 가소롭다.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물밥을 먹고 잤는데, 처도 약간은 먹었다. 피곤하여 누워 있는데, 여전히 추궁하며 말할 때마다 종대를 거론하니 참 가소로운 일이다.

낮에 누워 (부인에게) 농담으로 기생 중에 예쁜 애가 없다 했더니, 부인이 화를 내며 종대 생각하고 그런 것이라며 질책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초저녁에 달려 나가 아래 집으로 가 버리니 가히 ‘질투 잘하는 사람’이라 할 만하다.

부인이 여기에 머물렀다. 종대를 투기하여 여러 차례 눈물을 흘리고 오열을 그치지 않았다. 부인의 재난이 이 지경에 이르렀도다.144)『묵재일기』 1552년 10월 5일, 11월 21일, 11월 28일, 12월 7일.

이 일기의 내용만으로 봐서는 당시 칠거지악에 투기가 있기나 했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그만큼 김씨 부인의 감정 표현은 적나라하고 적극적이어서 투기가 부덕에 어긋난다는 위축감 같은 것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아마도 김씨 부인의 본래 성격에도 기인하겠지만, 어찌 보면 이때가 비교적 조선 초기에 가까워서 여자들이 아직은 유교적인 도덕성에 경도되어 있지 않았고, 따라서 그만큼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결국 이런 일을 겪고 이문건은 종대와의 관계를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문건 쪽에서도 나름대로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것은 역시 무의식적으로도 부부 관계, 나아가서는 가족 관계를 잘 유지하려는 의지가 작용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기생에 대한 이러한 질투와 달리 이미 오래된 첩에 대해서는 질투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천남이 어미가 오시(午時)에 아들을 낳았다. 영감 마음이 우쭐우쭐하신다. 나는 어찌된 팔자가 딸 하나와 아들 넷을 낳았으나 종적도 없어졌는가. 나이도 많고 병이 드니 더욱 설워한다.”145)『병자일기』 경진년(1640) 정월 11일., “차자(次子)를 얻으셔도 가지 못하시니 민망하다.” 『병자일기』에서 조씨 부인이 첩이 둘째 아들 낳은 것을 바라보고 적은 감회이다. 이미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부인은 전혀 질투하는 마음이 없다. 오히려 남편을 위해 반가워하는 분위기이다. 바쁜 남편이 아들을 얻었는데도 가 보지도 못하는 것이 민망하다는 말이 그렇다. 이렇게 첩이 된 지 오래면 첩을 첩으로 인정하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실상 조씨 부인은 첩에 대해 마음 쓸 겨를이 없어 보인다.

“손님네들이 종일 오시니 다 기록하지 못하겠다.”, “손님이야 그칠 사이가 있으며, 약주 아니 자실 리가 있으랴.”와 같은 접빈객(接賓客), 또 사직 대기(社稷大忌, 시아버지 제사), 양어머니 제사, 문밖 어머니(친정어머니) 제사 같은 봉제사(奉祭祀)로 늘 바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남편이 대사헌에 오 를 정도의 집안에서 적처(嫡妻)는 적처로서의 역할과 위치가 있기 때문에 신분이 다른 첩과는 애초부터 경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유희춘 집의 경우에도 부인 송씨가 남편의 유배지로 찾아갈 때 첩과 갈라놓을 계획이었다고 하지만, 그 사이 첩은 본거지인 해남으로 돌아갔고 그 후에도 계속 해남에 거주함으로써 적처와 첩이 대면하는 일은 거의 없이 지낸다. 앞의 남이웅 집안도 ‘남편이 가지 못한다’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첩은 한 집에 거주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처와 첩의 갈등은 처첩 사이의 위계질서가 확고하지 않을 때 커질 수 있다. 가령 첩이 처에 대해 위협적일 수 있는 것은 남편의 사랑에 한정된다. 비록 첩이 아들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그 아들은 서자 신분이기 때문에 첩이 자신의 아들을 근거로 하여 누릴 수 있는 권한이란 극히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적서(嫡庶) 구분이 명확하고, 또 처첩 간에 거처를 달리했던 조선에서는 처첩이 경쟁할 요인이 적었기 때문에 실제로 그 갈등이 극대화되는 경우는 드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생에 대한 투기든 첩에 대한 관리든 여성들은 부부 관계를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것은 삼갔다. 당시 부부들은 국가가 갈등 관계에 있는 부부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도 가족이 주는 안정감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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