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3장 정비된 혼인, 일탈된 성
  • 2. 조선시대 혼례와 혼수
  • 반친영의 탄생
  • 『주자가례(朱子家禮)』와 전통의 충돌
정해은

1576년 2월에 남원 사는 김장은 장녀를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손자 광선과 혼인시켰다. 혼례 날짜가 다가오자 김장은 혼례 방식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에 휩싸였다. 주변에서 혼례를 3일 잔치로 하지 않고 하루 만에 끝내는 집이 점차 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장은 신랑 집에 사람을 보내 혼례를 3일 잔치로 해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유희춘이 “서울에서도 몇 년 사이에 혼례 당일에 합근례(合巹禮)를 행하고 다시 3일 잔치를 하지 않으니, 이것이 간편하고 합당한 듯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여기서 김장이 언급한 ‘3일 잔치’는 무엇이며, 유희춘이 서울처럼 혼례 당일에 합근례를 하자고 답한 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

조선 초기 개혁가들은 고려 사회의 몰락을 교훈으로 삼으면서 국가의 긴급한 사명은 인간의 본성을 순화하고 풍속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에 무지한 백성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사회 질서를 지키고 통치에 순응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는 백성을 가르치고 깨우칠 필요가 있었 다. 개혁가들은 교화의 방편으로 억압과 물리력이 아닌 지속적인 교육을 택했고, 올바른 전통을 창안하기 위해 ‘예(禮)’의 보급에 착수하였다.

개혁가들은 고려와 다른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송나라의 주희(朱熹, 1130∼1200)가 제시한 규범에서 큰 감화를 받았다. 이들은 고대 중국 사회의 이상적인 통치 규범을 담은 『의례(儀禮)』와 『예기(禮記)』를 후대 현실에 적절하게 조화시킨 『주자가례』에서 새 왕조의 이상에 걸맞은 전범(典範)을 찾아냈고 이를 조선 사회에 적용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개혁가들은 인륜의 시초라고 하는 혼례를 선진국, 곧 중국 수준으로 맞추기 위해 1434년에 『주자가례』에 입각한 혼인 의식인 ‘종친급문무관일품이하혼례(宗親及文武官一品以下昏禮)’를 제정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포함시켰다. 그 뒤 1658년에 혼례는 『주자가례』를 따르도록 명하는 수교(受敎)가 내려지고 1746년에 완성된 『속대전(續大典)』에는 아예 이를 법으로 명시하였다.

주자가 『주자가례』에서 제시한 혼례 절차는 『의례』와 『예기』의 육례(六禮)를 토대로 하였다. 육례는 납채(納采, 신랑 집에서 청혼하고 신부 집에서 혼인을 허락하다), 문명(問名, 신부 이름을 묻다), 납길(納吉, 길흉을 점쳐 좋은 점괘 소식을 신부 집으로 보내다), 납징(納徵, 신부 집에 예물을 들이다), 청기(請期, 신랑 집에서 길일을 택해 신부 집에 가부를 묻다), 친영(親迎, 신랑이 친히 신부를 맞이하여 오다)146)『의례』, 『예기』에는 ‘친영’이라는 용어를 직접 쓰지 않았다. ‘친영’은 『주자가례』 에서 비로소 등장한다. 등이다. 주자는 『의례』와 『예기』의 기본 틀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시대 상황에 맞는 합리성을 강화하고 절차를 간소화시켰다. 그리하여 완성된 혼인 예식은, 의혼(議婚, 혼사를 의논하다), 납채(納采, 채택하는 예를 받아들이다),147)조선에서는 납채와 납폐를 서로 혼용해서 쓰기도 하였다. 납채는 ‘채택하는 예를 받아들이다’라는 뜻으로 혼사가 결정되면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혼인을 청하는 서식을 보내는 절차이다. 납폐(納幣, 신부 집에 예물을 들이다), 친영(親迎), 부현구고(婦見舅姑, 며느리가 시부모를 뵙다), 묘현(廟見, 신부가 사당에 인사하다), 서현부지부모(壻見婦之父母, 사위가 신부 부모를 뵙다) 등이다. 이처럼 주자는 문명·납길 등 혼례의 이전 단계를 과감하게 생략하고 신랑·신부를 새 식구로 맞아들이는 묘현·서현부지부모 같은 의식을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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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가 제시한 혼례의 절정은 신랑이 신부를 자신의 집에 직접 이끌고 와서 예식을 치르는 친영이었다.148)마르티나 도이힐러, 이훈상 옮김, 『한국 사회의 유교적 변환』, 아카넷, 2003, 338쪽. 『주자가례』에 나오는 친영 의식은 초저녁에 의복을 갖추어 입은 신랑이 신부 집에 당도하면 신부 집에서 신부의 초례(醮禮)149)혼례 날 신랑이 집을 떠나기 직전 사당에 고한 뒤 아버지가 그 앞에서 아들에게 의식에 따라 술을 내리면서 친영할 것을 명하는 예식이다. 또 신부 집에서도 부모가 사당에 고한 뒤 딸에게 의식에 따라 술(또는 단술)을 내리면서 부녀자 도리를 당부하는 예식이다. 이처럼 초례가 혼례 직전에 행해지므로 후대에는 초례가 혼례의 다른 명칭으로 쓰이기도 하였다.를 거행한 후 전안례(奠雁禮)150)신랑이 신부 집에 도착하여 가장 처음 치르는 의식으로 예물로 갖고 온 기러기를 신부 집에 전달하는 의식이다.를 행한다. 신랑은 신부를 이끌고 집에 도착한다. 신랑·신부가 신랑 집에 당도하면 교배례(交拜禮, 신랑·신부가 맞절하는 의식)와 동뢰연(同牢宴, 신랑·신부가 맞절한 뒤에 함께 음식을 먹는 의식)을 치르고 빈객을 대접한다. 다음날 날이 밝으면 신부는 시부모를 뵙는다. 3일째 되는 날 주인은 신부를 사당에 보인다. 4일째 되는 날 신랑은 신부의 부모를 뵙고 신부 집안의 여러 친족을 뵙는 의식을 치렀다.

개혁가들이 주창한 『주자가례』에 따른 혼례는 곧 많은 예학자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1685년에 김장생(金長生)이 편찬한 『가례집람(家禮輯覽)』에는 혼례 절차를 『주자가례』와 거의 유사하게 ‘의혼·납채·납폐·청기·친영·부현구고·묘현·서현부지부모’로 정하였다. 의례서 가운데 가장 많이 활용되었다고 평가받는 이재(李縡, 1680∼1746)의 『사례편람(四禮便覽)』151)『사례편람』은 이재 사후에 전사(傳寫)되어 내려오다가 1844년에 손자 채(采)와 증손자 광문(光文)·광정(光正)이 출간하였다.에도 ‘의혼·납채·납폐·친영’이라 되어 있다. 또 예학의 종장이라 불린 송준길(宋浚吉)은 1660년 2월에 손자 병하를 나성원의 딸과 혼인시키면서 일기에 ‘성아(聖兒, 송병아의 아명으로 보임)가 나씨 집안에 친영했다.’고 적었다.

이와 달리 상민들에게는 새로운 형태의 혼례가 잘 뿌리내리지 못하였 다. 여러 자료에 보이는 15세기 혼례는 친영례와 달리 3일씩이나 풍성한 잔치를 벌이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었다.152)장병인, 『조선 전기 혼인제와 성 차별』, 일지사. 1997, 139∼142쪽. 혼인 첫날에 신부 집에서는 문밖에 횃불을 환히 밝혀 놓고 신랑을 기다린다. 저녁 무렵에 신랑 역시 횃불을 밝힌 채 종자(從者)와 함께 신부 집에 당도하면 신랑은 의식을 치르지 않고 신부와 동침하였고, 신부 집에서는 음식상을 차려 종자를 대접하였다. 둘째 날에 신부 집에서는 신랑 친지와 친구 및 하객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면서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이는데, 이를 ‘남침(覽寢)’이라 하였다. 셋째 날에 신랑·신부는 유밀과상(油蜜果床)153)밀가루나 쌀가루를 꿀과 참기름으로 반죽해 여러 모양으로 만든 후 식물성 기름에 지져내어 꿀에 담가두었다가 쓰는 과자. 고려시대에는 불교에서 살생을 금하므로 제사에 고기나 생선 대신에 유밀과를 사용하였고, 조선시대에도 중요한 음식으로 애용하였다.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1543)에는 사치를 금하기 위해 동뢰연 이외의 잔치에서 유밀과 사용을 금하였다.을 앞에 놓고 비로소 상견례를 하였고 신랑과 신부가 3일 만에 얼굴을 마주하고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의미에서 ‘삼일대반(三日對飯)’이라 불렀다. 유밀과상은 신랑·신부를 위해 차렸는데, 사방 한 자나 되는 대탁(大卓)에 음식을 높게 쌓아 화려한 잔칫상이 되도록 하였다.

예식을 마치면 신부는 시부모를 찾아뵈었다. 신부가 처음으로 시부모에게 인사하는 시점은 정확하지 않다. 이날 신부는 시부모에게 드릴 술과 음식을 장만하고 노비를 거느리고 시가로 갔고, 시가에서도 새 신부를 맞이하는 의식을 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부 집이나 신랑 집에서 집안의 품격과 부를 지나치게 과시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신부가 시부모에게 인사할 때에는 술 한 동이와 반찬(안주) 다섯 그릇으로 하고 여자 종 세 명과 남자 종 열 명을 딸려 보내도록 규정하였다. 당상관 딸이면 여자 종 네 명과 남자 종 14명까지 데려갈 수 있었다.154)『경국대전(經國大典)』 권3, 예전 혼가(婚嫁). 또 종친(宗親)은 종부시에서, 양반가는 사헌부에서 서리와 의녀(醫女)를 신랑·신부 집에 각각 파견해 초상 중에 혼인을 치르지 않는지, 혼인 예단은 지나치게 사치스럽지 않은지 등을 조사하였다.

전통과 관례에 따른 혼례는 16세기 중반까지도 꽤 성행하였다. 1518년에 젊은 유학자 김치운(金致雲)이 모범적으로 친영례를 하기도 했으나 상징적인 조치로 끝났으며, 식자들은 여전히 ‘남녀가 외진 골방에서 몰래 만나 3일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상견’155)『중종실록』 권12, 중종 5년 12월 신축 ; 『명종실록』 권9, 명종 4년 4월 신축. 하는 혼속을 힐난하였다. 친영례가 예상 외로 세속의 강한 저항을 받아 정착이 어려워지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친영’156)반친영에 대해 이제신(李濟臣)은 “근래 사족의 집에서 혼인날 저녁에 『가례(家禮)』에 따라 행사하는 것을 ‘진친영(眞親迎)’이라 하고, 곧 그날 밤에 신부 집에 가서 혼례를 행하고 그 다음날 시부모를 뵙는 것을 ‘반친영(半親迎)’이라 한다.”고 하였다.(『대동야승(大東野乘)』 권57,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侯鯖瑣語)」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권12, 정교전고(政敎典故) 혼례)이라는 예식이 고안되었다. 여기에는 서경덕(徐敬德)과 조식(曺植)의 공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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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력 있는 입법자나 유학자들은 민간의 혼례를 전적으로 유교식 예절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이들은 혼례를 『주자가례』의 절차대로 치르도록 강요하는 대신에 두 가지 사항을 전통 혼례에 반영하였다. 곧 혼인하는 첫날 저녁에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당일에 신랑·신부가 대면하여 합근례와 동뢰연을 행하고, 그 이튿날 신부가 신랑 집으로 가서 시부모를 뵙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이 혼인 방식은 여전히 혼례를 신부 집에서 치르고 혼인한 후에 거주하는 곳도 처방(妻方)이므로 남귀여가혼의 전통이 역력하였다. 그러나 이 ‘반친영’이라는 절충안은 적어도 ‘외설스러운’ 혼 속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입법자나 유학자로서는 혼례를 둘러싼 논쟁을 일단락 짓는 일이었다.

신부 집에서 혼례를 하고 처방에서 거주하는 전통이 입법자나 유학자들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못한 배경에는 경제적 요인이 크게 자리하였다. 신랑 측에서는 남귀여가혼으로 생기는 경제적 이득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친영례를 하게 되면 혼례 준비도 문제였지만 생활공간의 마련과 생활비도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신부 집도 혼수를 당장 준비하는 일이 큰 압박이었고 딸이 생소한 환경에서 곧장 생활하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또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지적처럼 서울과 달리 향촌에서는 먼 길을 신랑·신부 모두 오고가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었다.157)안정복, 『순암선생문집(順庵先生文集)』 권3, 서(書), 여소남윤장동규서-기묘(與邵南尹丈東奎書-己卯). 이런 처지 때문에 양반들은 새로운 예식을 꺼리면서 ‘비루하다’고 비난받는 혼속을 오랜 기간 고수한 채 연대 의식을 공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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