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3장 정비된 혼인, 일탈된 성
  • 2. 조선시대 혼례와 혼수
  • 반친영의 탄생
  • 혼례 풍경
정해은

조선의 개국을 전후하여 고려보다 고양된 혼인 풍속을 만들기 위한 개혁가나 예학자들의 열정적인 노력이 비로소 빛을 보기 시작한 시기는 16세기 중반 무렵이었다. 조선에서 반친영례가 차츰 생활 속에 파고든 것이다. 반친영은 의례가 다소 복잡하나 혼례를 하루 만에 마치므로 3일 잔치를 벌일 때보다 비용이나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이런 가운데 정치·문화 중심지인 서울은 빠르게 반친영례가 정착하면서 다른 지역의 혼례 문화를 선도하였다.

1561년 11월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은 유배지 성주에서 손녀 숙희를 한양에 사는 감찰 정언규(鄭彦珪)의 아들 섭(涉)과 혼인시켰다. 이문건은 반친영례로 치른 혼례 풍경을 『묵재일기(默齋日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손녀 숙희는 혼례를 위해 판관 부인에게 빌린 장삼(長衫)을 입고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큰 띠, 곧 대대(大帶)를 두르고 머리 장식을 하였다.

신랑이 해지기 전에 도착하였다. 두 성주(城主)가 상객으로 참석하였다. 신랑이 바깥 자리(位)에서 두 번 절하자 집사(贊者)가 내청으로 인도하여 동쪽에 세웠다. 보모가 신부를 인도하여 서쪽에 세웠다. 서로 마주보고 두 번 절한 뒤에 각 자리로 돌아가 미리 차려 놓은 과상(果床)을 사이에 두고 동뢰연을 거행하였다. 세 잔을 표주박 잔으로 마시고 (혼례를 마친 후) 신랑이 방으로 들어갔다.

유희춘 역시 1576년 손자 광선을 장가들이는 과정을 일기에 소상히 적어 놓았다. 혼서 작성에서부터 함에 담은 물건, 납채를 보내는 행렬 구성과 납채 의식도 기록하였다. 광선이 남원에 가서 치른 혼례 역시 반친영으로 거행하였다. 유희춘은 혼례를 올리러 떠나는 손자에게 왼쪽이 길하므로 중문에 들어설 때에 왼발을 먼저 들여놓을 것, 기러기 머리를 왼쪽으로 할 것, 절하는 예는 왼쪽 발을 먼저 꿇을 것, 잔을 받을 때는 왼손을 먼저 내밀도록 신신당부하였다. 신랑 일행은 모두 여덟 마리 말에 나누어 타고 갔으며, 신노(新奴)도 포함되었다. 상객(上客)은 아버지 경렴, 육촌 광문, 외삼촌 참봉 김종호, 운봉 현감 박광옥이었다. 신랑은 은으로 꾸민 갓을 쓰고 홍자색 옷을 입어 한껏 멋을 부렸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관직이 있는 남자는 사모(紗帽)와 품대(品帶)를 착용하나 관직이 없는 사람은 갓을 쓰고 실띠를 매도록 했기 때문이다.

예식 진행은 신랑 일행이 신부 집에 도착하면 상객이 먼저 문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나아갔고 신랑이 마지막으로 기러기를 받든 중방을 거느리고 문 앞에 선다. 이에 집사가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문에서 맞이한 후 읍(揖)하면서 들어오기를 청하고 신랑은 세 번 사양한 뒤에 집사의 인도로 들어가 전안례를 하였다. 이어 신랑은 중당에 들어가 신부 자리 쪽을 향해 서고 신부도 나와 마주 섰다. 신부가 신랑을 향해 네 번 절하고 신랑은 두 번 절하여 답하였다. 이어 신랑이 먼저 읍한 후 상을 마주하고 서자 신부도 따 라서 정해진 자리에 섰다. 신랑·신부는 차려 놓은 상을 중간에 두고 마주 서서 술을 석 잔씩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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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복 복원도
혼례복 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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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가 끝나면 시자(侍者)가 신랑을 따로 마련한 장막의 병풍 안으로 인도했으며, 유모는 신부와 함께 방으로 가서 웃옷을 벗겨주고 나왔다. 이어 다시 시자가 신랑을 신부 방으로 안내하였다. 조금 뒤 신부가 방에서 나와 내실로 들어가고 신부 남동생이 나와 신랑과 저녁밥을 들었다. 어두울 때에 신부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신부 아버지는 상객을 초청하였다. 신랑 아버지가 먼저 들어가 신부 어머니 유씨와 상견하고 이어 김종호·유광문과 함께 신부의 인사를 받았다. 신부는 머리를 틀어 올리고 시아버지에게 술 두 잔을, 두 사람에게 술 한 잔을 올렸다. 상객이 나가면 신부가 일상적인 머리를 하고 다시 시아버지를 뵈었다.

혼례 문화가 반친영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의례가 익숙하지 않고 복잡하다 보니 예식 진행에 혼선을 빚기도 하였다. 『주자가례』에는 동뢰연을 할 때에 첫 잔을 마신 후 안주(음식)를 먹도록 했으나 유광손의 혼례에는 이 의식이 빠져 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유희춘은 잔치에 참석하고 돌아온 사람들로부터 혼례 때 붉은 수건과 대탁이 설치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또 신랑·신부가 중당에 들어가 한참 동안 얼굴을 마주보고 있을 때까지 과상(果床)이 없다가 겨우 과상을 차렸는데, 고배(高排, 높이 고임) 한 벌만을 설치했고 쇠로 만든 술잔을 사용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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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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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부 집에서 대탁을 설치하지 않은 이유는 잊은 것이 아니라 반친영에는 대탁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또 ‘근(巹)’은 조그만 박 하나를 쪼개서 두 개로 만든 것으로 함께 술을 든다는 의미에서 합근(合巹)이었다. 그런데 쇠 술잔을 사용해 합근례를 해버린 것이다. 반친영례를 둘러싼 이 한바탕 소동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민간에서는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새 의례를 수용해 갔던 것이다.

1626년 4월에 전라도 영광에 사는 선비 신응순(辛應純, 1572∼1636)도 차녀의 혼례를 반친영으로 치르면서 기록을 남겨 두었다. 신응순이 행한 반친영 의식은 유희춘의 사례에 비해 50년 정도 지나서인지 『주자가례』에 상당히 근접해 있었다. 전안례와 교배례를 마친 후 동뢰연 때 술잔을 세 번 돌렸다. 『주자가례』대로 첫째 잔은 고수레를 하고 안주와 함께 먹고, 둘째와 셋째 잔은 고수레를 하지 않고 안주 없이 마셨는데, 셋째 잔째에서 합근을 위해 표주박잔을 사용하였다. 다만 돼지고기(特豚, 돼지 한 마리)를 중심으로 상차림을 하는 『주자가례』와 달리 이 때 상차림은 과일과 나물 위주로 차려 놓아 일부분에서 여전히 관례를 좇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반친영 혼례는 전통적인 의례를 일시에 불식하지 못했으나 서서히 새로운 전통의 창출을 향해 나아갔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1810년에 유배지 강진에서 『가례작의(家禮酌儀)』를 지었다. 이 책에서 정약용은 서울 양반가의 혼속에 대해 하루 동안에 혼례를 치르고 신부가 시부모에게 인사하니 이를 ‘당일 신부’라 하며 합근례를 신부 집에서 할 뿐 친영이나 다름없다고 평하였다. 1894년과 1897년에 영국 지리학자로 조선을 방문한 비숍(Isabella Bird Bishop)도 한국의 혼인 풍습에 대해 혼례 당일 오후에 신부가 혼례복을 입은 채 가마를 타고 시가로 가서 시부모에게 인사하고 돌아온 후, 3일이 지나 영원히 시가에 살러 들어간다고 기록하였다.158)이사벨라 버드 비숍, 이인화 옮김,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살림, 1994, 140∼142쪽. 둘 다 서울의 모습이지만 이제 조선의 혼례는 수백 년에 걸쳐 전통과 관습을 서서히 바꾸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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