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3장 정비된 혼인, 일탈된 성
  • 2. 조선시대 혼례와 혼수
  • 밖으로 드러난 혼수, 감춰진 혼수
  • 혼례에 소용되는 물품
정해은

앞서 소개한 이문건은 1561년에 손녀 숙희의 혼사가 결정되자 혼례 준비로 분주하였다. 노비들을 시켜 가족이 거주하는 하가(下家)를 손질하여 남쪽 방 창과 벽을 수리하고 서쪽 창에 문풍지를 붙이고 벽지도 새로 발랐다. 옷농은 바깥채로 옮기고 바깥 문짝을 보수하였고, 서방(書房)에 나무못으로 현판도 달았다. 또 목수를 시켜 남쪽 행랑 두 칸과 측간의 앉는 틀을 만들고 동가(東家) 뒤쪽 섬돌 아래에 내측간(內廁間)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작은 농짝을 놓을 시렁도 만들도록 하였다. 음식을 마련할 숙수청(熟手廳)을 마련하고 합근례 상을 세 줄로 차리도록 준비시켰다.159)김소은, 「16세기 양반가의 혼인과 가족 관계」, 『국사관논총』 97, 국사편찬위원회, 2001, 107쪽. 이처럼 이문건이 노력을 기울여 준비한 혼수는 신혼부부가 거처할 주거 마련과 혼례 음식으로, 신부 집에서 혼례가 거행되고 주거가 정해졌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에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지은 『김신부부전(金申夫 婦傳)』과 『동상기(同廂記)』에는 혼례에 들어가는 온갖 물품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책은 정조의 명으로 가난한 양반 서손(庶孫)을 위해 서울 관아에서 치른 혼례를 기록한 글로, 정조는 특별히 혼수를 1등급으로 마련하도록 지시하였다. 관에서 마련한 물품은 납폐에 쓸 비단, 관(冠)과 신발, 비녀·가락지, 치마·저고리, 이불·요, 쟁반·바리 등 그릇붙이, 소반·대야, 청주와 탁주, 떡, 장막·병풍, 화문석, 그림, 초와 향(香), 경대·연지·분 등 온갖 화장품, 안장 갖춘 말 등이며 호위할 하인도 갖추었다. 또 신방에는 병풍·화문석·등매(登每),160)헝겊으로 외곽을 두르고 위에 부들자리를 대서 만든 돗자리로 ‘등메’라고도 한다. 이불과 요, 남녀 베개와 요강·비누통·나무 양치통·경대·놋대야·놋반상·혼서함(婚書函)과 보자기 등을 마련하였다. 신랑·신부의 의복 또한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게 갖추었다.

혼례에 필요한 물품은 1893년에 나온 『광례람(廣禮覽)』에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누군지 알 수 없으나 ‘수산(綏山)’이란 호를 사용하였다. 저자는 혼례 때 필요한 온갖 물품을 세밀하게 정리하면서 전용속례(全用俗禮), 즉 전적으로 당대(當代) 풍속을 따른다고 밝혔다.161)유득공(柳得恭)이 지은 『경도잡지(京都雜志)』에는 19세기 한양의 혼례 행렬이 소개되어 있다. 신랑은 백마를 타고 보랏빛 비단 단령을 입고 물소 뿔로 만든 띠를 두르고 사모를 썼다. 신랑 앞에는 청사초롱 네 쌍을 늘어세우고 안부(雁夫)가 나무 기러기를 받들고 인도하며 그 뒤에는 하인들이 신랑을 호위한다. 신부는 윗부분을 황동으로 장식한 팔인교(八人轎)를 타고 가마 앞에는 청사초롱 네 쌍, 보자기로 덮은 혼수를 상에 올려서 받들고 가는 안보 한 쌍, 대추·포·옷 상자·경대·부용향을 받든 여자 종 12명이 짝을 지어 앞에서 신부를 인도한다. 유모는 검은 비단으로 만든 가리마를 쓰고 말을 타고 신부 뒤를 따른다. 이 내용에서 보듯이 신랑 차림새나 신부 행차의 물품, 인원 규모가 『광례람』에 나오는 내용과 매우 유사하여 ‘전용속례’라는 말이 실감난다. 여기서 당대 풍속이란 반친영례를 말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물품의 가짓수를 보면 혼례 때 이렇게 많은 물품이 쓰일까 싶을 만큼 물품의 규모가 놀랍다.

신랑 집에서는 납폐, 신랑 행차, 혼례 직후 신부가 시부모를 찾아뵙는 신례(新禮)·해현례(解見禮)162)『광례람』에는 ‘서가송교자급교군솔래신부(婿家送轎子及轎軍率來新婦)’라 하여 신랑 집에서 가마와 가마꾼을 보내 신부를 데려온다고 하였다. 바로 앞에 혼례 직후 시부모를 뵙는 의식인 신례가 있으므로 해현례는 아마도 우귀(于歸)를 지칭하는 듯하다. 참고로 풀보기란 ‘새색시가 혼인한 며칠 뒤에 시부모를 뵈러가는 예식’이라고 풀이한 경우도 있다(『조선시대 관혼상제』 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220쪽).에 쓸 물건을 준비해야 했다.

납폐 때는 함, 현(玄)·훈(纁), 청실·홍실, 청색·붉은색 종이, 네 폭·다섯 폭짜리 붉은 명주 보자기 각 하나, 근봉지(謹封紙), 혼서지, 혼서를 싸는 보자기, 부용향(芙蓉香)163)혼례 때 행렬 앞에서 피우는 향. 굵기는 손가락만 하며 길이는 5치 정도이다. 심지 큰 것(또는 작은 것) 두 쌍, 함지박, 짐을 지는 데 쓰는 누인(練) 무명 열일곱 자, 비 올 때 신는 장화, 흑단령과 붉고 넓은 띠(帶), 주립·등롱, 자개 갓끈, 황촉 두 쌍, 횃불 한 단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함진아비와 배종(陪從) 하인 각 한 명, 등롱꾼 네 명이 있어야 했다.

신랑 행차 때는 장복(章服)과 사모, 사모 밑에 쓰는 귀 가리개(耳掩), 물 소 뿔 띠, 황색 주머니, 보랏빛 창의(氅衣),164)옆 솔기가 트인 옷. 여기서는 안에 흰 명주를 받친 쾌자(快子)로, 전복(戰服)처럼 생긴 옷이다. 황색 주머니를 매는 녹색 실, 백마(白馬), 무명 일곱 자, 등롱 두 쌍, 홍촉 두 쌍, 흑의(黑衣) 여섯 벌, 산 기러기, 한 폭 짜리 붉은 명주 보자기, 말의 코를 장식하는 붉은 실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안부(雁夫)와 배종 하인이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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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례 때는 지의(地衣),165)가장자리를 헝겊으로 꾸미고 여러 개를 잇대어서 크게 만든 돗자리이다. 등매, 꽃무늬 방석, 햇빛 가리개가 필요하였다. 동원되는 사람은 가마꾼 열 명, 등롱꾼 네 명, 안보(按步)166)『경도잡지』에는 ‘案袱(안복)’이라고 되어 있다. 네 명, 우산 담당, 배종 하인, 폐백 들고 가는 여종 두 명, 몸종 두 명, 경대·함 들고 가는 여종 각 두 명, 아이 여종 두 명, 방지기 여종, 문안 여종, 수모(手母)와 수모 여종 두 명, 유모와 유모 여종 한 명, 수모가 탄 가마꾼 두 명, 유모 마부 등이 있어야 했다.

해현례 때는 가마와 가마꾼 여섯 명, 흑의 여섯 벌, 배종 하인, 어른 여종과 아이 여종 각 두 명이 필요하였다.

신부 집에서 준비하는 물건은 신랑 집보다 규모도 크고 복잡하였다. 신부 집에서는 납채 받기, 전안례·혼례·신례, 신방 꾸미기에 쓸 물품을 마련하였다.

납채 받기를 위한 물품은 햇빛 가리개, 다리 높은 상(高足床), 모란 병풍, 상보, 지의, 붉은 보자기, 큰 촉대 한 쌍, 큰 홍촉(紅燭) 한 쌍, 등롱 두 쌍, 심지가 붉은 초·황촉(黃燭) 두 쌍, 붉은 나조(羅照),167)신부 집에서 납채 의식을 행할 때 초처럼 불을 켜는 것. 갈대 등을 한 자 정도 잘라 묶어서 기름을 붓고 붉은 종이로 싸서 만든다. 중간 크기 횃불 한 단, 흑의 네 벌이다. 사람은 여종과 아이 여종 각 두 명이다.

전안례 물품은 지의, 모란 병풍, 전안석, 문에 켜놓는 횃불, 행보석(行步席),168)마당 위에 까는 좁고 긴 돗자리. 귀한 손님이나 신랑·신부가 행사장까지 이 돗자리를 밟고 걸어 들어온다. 전안상에 까는 붉은 보자기, 큰 촉대 한 쌍, 큰 홍촉과 심지가 붉은 초 한 쌍, 촉롱(燭籠) 두 쌍, 붉은 나조 두 쌍, 흑의 네 벌이며 배종 하인이 필요하였다.

혼례 물품은 지의, 다리 높은 상, 교배석, 상보, 꽃무늬 방석, 향 받침대, 모란 자리, 향좌아(香坐兒)169)향로나 향합을 올려놓는 데 사용하는 네모반듯하고 작은 탁자 모양의 받침. ‘향좌아(香座兒)’로도 표기한다. 한 쌍, 청온향(淸瘟香)170)향 종류의 하나. 청원향(淸遠香)을 말하는 것 같다. 한 쌍, 심지가 붉은 초 한 쌍, 대주렴 한 부, 붉은 나주 두 쌍, 큰 촉대 한 쌍, 큰 붉은 초 한 쌍이다. 그리고 나이 든 여종과 어린 여종 각 두 명도 필요하였다.

신례 때 쓰는 물품은 금교(金轎), 우산 12개, 흑의 18벌, 안장 갖춘 말 세 마리, 향꽂이, 부용향, 여자종 옷 12벌이며, 사람은 등롱꾼 네 명, 안보 한 명, 여종 여덟 명, 어린 여종 네 명이다.

신방 꾸미는 물품은 병풍 대·중·소 각 하나, 초립·등매 한 쌍, 도포·벼루함·벼루·붓·먹, 색깔 있는 편지지, 초록 띠(綠帶)·책상·복건·이불·베개·요, 이불보로 쓸 자주 보자기, 세숫대야·수건·비누통·침석·빗·요강·촉대, 발목 아래까지 오는 색깔 있는 가죽신(鞋), 부용향 등이다.

이상에서 검토했듯이 신랑·신부의 혼수 물품은 혼례를 반친영례로 하다 보니 신랑 집보다는 신부 집에서 준비할 물품이 많았다. 신부 집의 경우 신랑·신부의 옷과 요·이불 마련 등 바느질에도 시간을 많이 할애하였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난 측면 못지않게 신랑 쪽에서 준비하는 혼수, 특히 납폐 때 보내는 혼인 선물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양성지(梁誠之, 1414∼1482)는 “사위가 혼인날 저녁에 재물을 진 노복을 앞세우고 신부 집에 가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인척이 다 돌아보지도 않으니 이것이 무슨 예속입니까?”하고 혼인 선물을 둘러싼 폐단을 비판하였다.171)양성지, 『눌재집(訥齋集)』 권4, 주의(奏議), 편의삼십이사(便宜三十二事). 이 문제와 관련하여 데이비스(Natalie Zemon Davis)는 『선물의 역사』라는 책에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결혼은 삶의 주기에서 선물 교환이 균형을 이루는 사건으로 신부의 지참금 못지않게 신랑도 많은 물건을 신부 집에 보냈다고 한다.”172)나탈리 제먼 데이비스, 김복미 옮김, 『선물의 역사』, 서해문집, 2004, 59∼62쪽.라고 했는데, 조선의 실정도 이와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신랑이 준비하는 혼수는 신랑이 속한 집안의 부와 위세를 과시하는 동시에 신부 집안에게 이 혼례가 대단히 성공적인 연대임을 확인하게 해 주는 기회였다. 유희춘이 손자 사돈집에 보낸 혼수함에는 현(玄)·훈(纁) 각 한 필, 홍사(紅紗) 한 필, 자단자(紫段子) 한 끝, 압두록(鴨頭綠) 한 단, 청릉(靑綾)·명주 각 한 필이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현·훈·사·단자·능·주는 명주를 제외하고 대부분 값비싼 중국산 수입 비단으로 혼수 사치를 막기 위해 혼인 때 사용을 금한 물품이었다. 신부 집에서는 유희춘 집안이 죽도 못 먹는 가난한 집이라고 여겼다가 납채를 받아보고 의혹을 풀었다고 할 만큼 이 납채는 꽤 화려한 규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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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함을 지고 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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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 전라도 흥덕에 세거하던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은 1772년에 큰아들 일한(一漢)을 임적하의 딸과 혼인시켰다. 황윤석은 큰아들의 혼사를 위해 사방으로 혼처를 구하는 동시에 주위 사람들에게 각종 혼례 정보를 수집하였다. 이 과정에서 황윤석은 1767년 봄에 서울에서는 신랑 집에서 조촐하게 치르는 혼인 비용으로 50냥 정도 든다는 말을 듣는다. 또 납폐에 쓸 비단은 현·훈을 쓰지만 청색·홍색 두 비단으로 대신한다는 사실도 접한다. 그리고 신부 가발(髻髮) 값으로 30냥 정도 쓴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란다. 황윤석이 쓴 일기 『이재난고(頤齋亂稿)』에 따르면 1768년 무렵 서울에서는 한 냥을 주면 쌀 한 말 내지 아홉 되를 살 수 있었다고 하므로 30냥이란 적지 않은 비용이었다. 앞서 유희춘도 서울에서 반친영이 유행하자 쫓아했듯이 황윤석 역시 서울 분위기를 알고 난 후 호사스럽지는 못하나 촌스럽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쓴다. 1767년 겨울에 채단으로 쓸 청색·홍색 두 비단(紬)을 23냥 주고 마련하고 상자에 담긴 은비녀도 5냥 1전 7푼에 사두었다. 또 혼수함도 3냥을 주고 미리 장만한 후 금박으로 된 ‘壽福(수복)’ 글자를 사서 겉에 붙이고 청록색 화지(花紙)도 4전에 사서 혼수함 안쪽에 발라 치장하는 정성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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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의 혼수는 반친영제가 정착되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점차 부담이 커졌을 것으로 보인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시집가지 못한 노처녀에 대한 조치를 초점으로 한 『경국대전』 조항과는 달리 정조 때에 간행된 『대전통편(大典通編)』에서 ‘때를 넘기도록 시집가거나 장가들지 못한 사람’을 3년마다 보고하도록 하는 등 늙은 총각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것도 점차 신랑이 부담해야 할 혼수가 늘어났음을 반영한다. 후기에 혼인 뒤 신부가 친정에 머물다가 시가로 들어가는 기간이 점차 단축된 것도 신랑 측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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