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3장 정비된 혼인, 일탈된 성
  • 2. 조선시대 혼례와 혼수
  • 밖으로 드러난 혼수, 감춰진 혼수
  • 감춰진 혼수
정해은

전래 문학으로 유명한 『장화홍련전』은 1650년대에 평안도 철산에서 발생한 사건을 바탕으로 18∼19세기에 소설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후처 허씨가 장화를 죽이려고 마음먹은 시점은 흥미롭게도 남편 배무룡이 장화를 명문 집안과 혼인시키기 위해 후처에게 혼수를 잘 장만하라고 말한 뒤였다. 허씨는 장화가 혼인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화를 모함하여 죽이게 된다. 혼수와 장화의 죽음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장화홍련전』의 이야기 구조에는 확연히 드러나 있지 않지만 최소한 혼수가 꽤 복잡한 함의(含意)를 갖는 문제임을 새삼 환기하고 있다.

동양 사회에서 ‘폐백’이란 전통적으로 상대편에게 예(禮)로써 자신의 신실한 마음을 표현하는 증표였다. 예컨대 스승이나 웃어른을 찾아뵐 때에 바치는 폐백은 존경하는 마음을 공경히 드러내는 표시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혼인 때 주고받는 예물 역시 신의를 나타내는 수단이라 볼 수 있다. 『소학(小學)』에서도 혼례를 위해 남녀가 예물을 주고받는 이유에 대해 인간의 분별력을 밝히기 위한 목적이라고 하였다. 남녀의 분별이 있은 뒤에 의리도 나고 예가 일어나므로, 분별도 없고 의리도 없으면 금수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혼수는 마음의 표시를 넘어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조선시대 각종 사료에는 혼수의 부담이나 호사스러운 혼수 폐단을 성토하는 지적이 넘쳐나며, 신부의 혼수를 둘러싼 각종 잡음에 대한 기록도 무성한 편이다.

『경국대전』에는 사족의 딸로서 나이가 30이 되도록 가난하여 혼인하지 못한 경우에 혼례 비용을 지급하도록 할 만큼 혼수 비용이 없어 혼인하지 못한 여자는 국가의 혜휼(惠恤)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 규정에서 노총각이 빠져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나 이덕무도 딸 가진 집에서 혼수 마련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빚을 낸다든지, 여자의 혼수 비용이 많이 들어 혹 갓 난 딸이 죽으면 사람들이 돈 벌었다고 위로하는 세태를 실감나게 전하고 있다.

사실 신부가 준비하는 혼수는 앞서 소개한 혼례에 소용되는 물품이 전부가 아니었다. 혼인 때까지는 주로 혼례와 신방을 차릴 준비라면 본격적인 혼수 준비, 곧 시가에 살러 들어갈 차비는 우귀(于歸, 신부가 영원히 시가에 살러 들어감)까지 지속되었다. 한참 후인 1923년 구례 운조루에 사는 유형업(柳螢業)은 장녀 혼수로 당목·옥양목·명주·소고기·돼지고기·홍합·김·밤·호두 등 54종에 대해 93원 13전 4리를 지출하였다. 그 후 장녀가 1924년 12월에 우귀 때 가져간 물품은 장롱·반상기·수저·요강·빗·참빗·옥양목·명주·짚신·백지·누룩·생닭·밤 등 31종이며 90원 7전이 들었다. 혼례 때나 우귀에 쓴 비용이 비슷한 점은 신부의 혼수 준비가 혼례와 동시에 끝나지 않음을 보여 준다.

또 다른 사례로 황윤석의 장녀는 혼인 후에 시집으로 간 직후 아버지에 게 한 냥짜리 왜경(倭鏡) 하나와 치마저고리를 만들어 입을 한 냥짜리 녹색 비단(綠紗)을 사서 보내도록 요청하였다. 일기에 물품을 보냈다는 기록이 없으나 장녀의 부탁을 받은 황윤석이 어머니도 없이 혼인한 딸을 측은해하는 것으로 보아 곧 마련해 보냈을 것이다. 이처럼 갓 시집간 딸이 쓸 물건이나 옷감도 신부 집 몫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확대보기
시집으로 가는 신부 행차
시집으로 가는 신부 행차
팝업창 닫기

여기서 앞에서 언급한 『장화홍련전』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배무룡과 후처는 전처가 남긴 재물로 비교적 부유했으므로 혼수는 어렵지 않게 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불화의 발단은 장화가 재산 많은 전처의 자식으로 혼인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에 있었다. 『경국대전』에는 전모(前母)나 계모의 재산 상속분을 의자녀(義子女)보다는 친자녀 쪽에 몰아주었고, 친자녀가 없으면 일정 한도 내에서 의자녀에게 돌아가는 몫을 늘려 놓았다.173)“자녀가 없는 전모나 계모의 노비는 의자녀에게 5분의 1을 주되 승중자(承重子)에게는 10분의 3을 더 준다. 자녀가 있는 전모나 계모의 노비는 의자인 승중자에게 9분의 1을 준다. ……자녀가 없는 남편·처의 노비는 비록 상속인이 없더라도 생존자가 분별하여 처리하되 본족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으며, 만약 첩자녀·의자녀·양자녀가 있어도 그 몫을 (규정을) 넘어서 줄 수 없다.”고 되어 있다(『경국대전』 권5, 형전(刑典) 사천(私賤)). 그래서 허씨는 전처가 남긴 재산이 장화의 혼인을 계기로 크게 축날 까 우려했고 장화와 홍련만 없다면 자기 아들에게 더 많은 재산이 상속되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장화가 혼인을 앞두고 죽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174)정지영, 「장화홍련전-조선 후기 재혼 가족 구성원의 지위-」, 『역사비평』 61, 2002, 438∼439쪽.

혼수는 혼례 경비 또는 혼인 즈음에 주고받는 선물에 국한되지 않고 혼인을 전후한 시점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16세기 후반 유희춘의 장손 광선은 혼인을 마친 후 본가로 돌아올 때 신노비(新奴婢)로 노 네 명, 비 네 명을 데려왔고, 치장된 말과 마부 두 명도 함께 왔다. 이는 신부가 특별 증여(別給)로 분배 받은 몫으로 유광선이 본가에서 받은 신노비 네 명보다 많았다. 광선이 본가에 있는 동안에도 신부 집에서는 큰사위에게 의복을 마련해 보내고 말 한 필도 보냈다. 또 서울에 집을 마련해 주겠다는 의향도 내비쳤다. 유희춘은 갓 혼인한 손자에게 혼례 후에 여러 선물로 호의를 표시하는 사돈에 대해 흡족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신노비란 혼인할 때 신랑·신부에게 부모나 친지들이 특별히 주는 노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자식 한 명당 2∼6구 정도 주었고, 17∼18세기 이후 균분 상속이 해소된 시점에서 딸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지 않는 집안도 신노비만은 아들과 동등하게 분급하였다.175)문숙자, 『조선시대 재산 상속과 가족』, 경인문화사, 2004, 63∼78쪽. 특별 증여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혼인 후에도 갖가지 명목으로 지급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은 생원시와 문과에 합격하자 처가에서 총 16구의 노비를 받았다. 황신(黃愼)도 과거에 급제하면서 처가에서 총 15구의 노비를 받았다. 김연(金緣)은 관직이 승진하자 처가에서 선물로 답 15두락을 특별히 받았다.

혼수와 관련해 19세기 중반의 설화집 『해동야서(海東野書)』에 나오는 약국 점원 박비장 이야기가 주목된다. 어려서 고아로 자란 박비장은 무장 이장오의 신임을 얻어 부잣집 딸과 혼인하는데, 신부가 혼수와 살림을 호사스럽게 해 와서 졸부가 되나 초개처럼 여겼다고 한다. 신부 혼수로 졸부가 되었다면 혼수가 물품에 그치지 않고 재산 형성에 기반이 되는 땅이나 노비도 함께 왔을 가능성이 높다.

『정조실록』에도 1791년에 이민행(李敏行)이 부자라고 소문나자 황종오(黃鍾五)가 그의 손녀딸과 혼인한 뒤 첩으로 낮추고 새 장가를 가려고 한 사건이 실려 있다. 당시 이민행의 재산을 보고 혼사를 맺은 양반가가 열세 집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양반이 혼인 조건을 가름할 때 신분이나 가문의 품격 못지않게 경제력을 중시한 데에는 재산 증식에 유효한 혼수까지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수는 외부로 드러나지 않은 ‘감춰진’ 혼수로서 경제적 처지를 증진하는 데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고 아들·딸 균분 상속이 이루어진 시기에는 그 가치가 더 높았을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