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3장 정비된 혼인, 일탈된 성
  • 2. 조선시대 혼례와 혼수
  • 밖으로 드러난 혼수, 감춰진 혼수
  • 혼수 부조의 연계망
정해은

예나 지금이나 혼인을 앞둔 혼주의 가장 큰 고민은 혼수 물자의 마련일 것이다. 『광례람』을 보면 햇빛 가리개, 고족상, 병풍, 상보, 지의 등 각종 자리, 꽃방석, 등롱, 큰 촉대, 큰 붉은 초, 향꽂이, 붉은 나조, 횃불, 장목, 말(馬), 각종 옷가지 등 일회용으로 쓸 물건이나 개인이 마련하기 힘든 물품은 관아나 군문(軍門)에서 빌리고, 함지박이나 가마는 시중에서 돈을 주고 세내도록 하였다.

양반은 물론 상민이 혼례 물품을 관아에서 빌릴 수 있던 것은 혼인이 백성을 잘 정착시켜 양인(良人)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꾸준히 추진된 결과였다. 이는 조선에서 혼인이 개인의 일로 치부되지 않고 상부상조해서 잘 마쳐야 하는 공동 과제로 고려된 측면을 보여 준다. 그러나 여전히 혼수에서 폐백이나 음식 등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의 사례를 통해서 단편적이나마 흥미로운 답을 찾을 수 있다. 오희문은 서울에 근거지를 둔 양반으로 관직에 나가지 못했으나 아들 윤겸(允謙)이 인조 때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만년에 선공감(繕工監) 감역 을 지냈다. 1591년 11월 27일에 오희문은 지방에 거주하는 노비의 신공(身貢)도 받고 혼인한 누이동생을 방문하기 위해 전라도로 여행을 떠났다가 1592년 4월에 장수에서 임진왜란을 맞이한다. 오희문은 충청도 임천에 거처를 정하고 이곳에서 4년 동안 피란 생활을 하였다. 임천에는 지인도 많고 윤겸의 친구 신응구(申應榘)가 전라도 함열의 수령으로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1597년에 오윤겸이 강원도 평강 현감으로 부임하자 오희문은 다시 평강으로 거처를 옮겼다.

오희문에게는 3녀 4남의 자녀가 있었는데, 셋째 아들 윤함(允諴)과 딸 두 명을 피란 생활 중에 혼인시켰다. 오희문은 큰딸을 1594년 8월에 신응구와 혼인시켰다. 피란살이를 하던 오희문은 이 무렵 생활이 몹시 궁색하였다. 아들 윤겸도 사마시에 합격한 후 이렇다 할 만한 벼슬이 없이 당시 양호체찰사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활약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희문이 혼수 문제를 해결하기란 쉽지 않았다. 혼인 날짜가 다가오자 오희문은 지인들에게 신부 예복을 비롯해 혼인식 물품을 빌리려고 하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신응구는 혼인이 성사되기 전부터 오희문 집안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는데, 혼인날이 다가오자 여러 물품을 보내 예식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신응구는 오희문에게 혼인 때 쓰도록 백미 한 석, 중미 한 석, 누룩 한 동, 감장(甘醬) 4두, 간장 네 되, 소금 한 말, 뱅어젓 한 말, 굴비와 소금에 절인 위어(葦魚, 웅어) 각 세 두름, 조기 열 묶음을 보내 주었다. 이어서 팥 다섯 되, 찹쌀 한 말, 목미(木米) 다섯 되, 찹쌀가루 다섯 되, 민어 두 마리, 문어 세 조각, 전복 두 꼭지, 미역 일곱 동을 보내왔다.

또 오희문이 임천 관아에서 혼인 때 쓸 물건과 사기그릇, 횃불을 들 거군을 빌리기로 했으나 어사(御史)가 임천에 들어오는 바람에 차질을 빚자 신응구는 침석 두 개, 동뢰연에 쓸 방석 두 개와 깔고 치는 물품들, 쇠기름으로 만든 초(肉燭)도 보내 주었다. 신응구가 보내온 물건은 이뿐만이 아니 었다. 잔치 음식에 쓸 찐 닭과 국수, 술, 과일, 돼지머리 등도 보내 주었다. 또 함열 관아의 장무(掌務)도 양 한 짝, 닭 한 마리, 민어 한 마리를 보내 주었고, 잔치에 쓰고 남은 음식 및 쇠고기, 게 등도 갖다 주어 오희문은 제법 풍성한 잔치를 치를 수 있었다.

이로부터 2년여 지난 1596년 5월에 오희문은 셋째 아들 윤함을 김경(金璥)의 딸과 혼인시켰다. 아들 혼사이다 보니 준비할 혼수가 줄었으나 전쟁 중이어서 생활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으므로 이때에도 함열 수령으로 있는 사위 신응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신랑의 혼수로 중요한 신부 채단은 사위가 마련하였다. 청단(靑緞) 3승 1필을 구해 주고 홍단도 추후에 구해 주었다. 오희문은 사위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일기에 “저희 일이나 내 일이나 모두 자방(子方, 신응구)이 처리해 준다.”고 적었다. 납채에 쓸 함과 금띠는 진사 이중영에게 편지를 보내 빌리고 신랑 예복도 빌려 왔으나 품이 맞지 않자 사위의 관복을 가져다 입었다. 『쇄미록』에 의하면 오희문이 직접 마련한 것은 폐백으로 쓸 청모시(靑苧)를 사기 위해 장날에 남자 종을 시켜 포목을 팔아 쌀로 바꾸어 둔 것뿐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계속 평강에 머물러 있던 오희문은 1600년 3월에 둘째 딸을 이산 수령 김가기(金可幾)의 아들 덕민(德民)과 혼인시켰다. 오희문은 이 혼사를 위해 이전과 달리 다양한 인맥을 활용해 물품을 조달하였다. 오희문은 혼례를 준비하기 위해 서울·통천으로 노비를 보내 혼인 때 쓸 물건을 사오게 하는 한편 지인들에게 물품을 제공받았다. 서울에 사는 참판 황신 집에서 신부 저고리를 얻어 오며, 통천 군수와 아전, 철원 부사가 문어·가자미·은어·전복·미역·소금·알젓·송어·대구·방어·백미·참기름·생밤·포·호두 등 혼례에 쓸 각종 음식을 보내 주었다. 평강 수령 이민성도 백미 다섯 말, 밀가루 두 말, 콩 다섯 말, 꿀 네 되, 개암과 잣 각 다섯 되, 호두 네 되, 석이 세 말, 목미 두 말을 보내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아전들도 사슴 뒷다리 한 짝, 갈비 한 짝, 벌집 한 개, 꿩 세 마리, 대미 한 말, 말린 꿩 두 마리 등을 가져왔다. 이 밖에 남자 종 부귀의 이름으로 환자(還子)를 받아 혼인 때 보태었다.

이처럼 둘째 딸의 혼례 물품이 이전과 달리 풍요로워진 데에는 무엇보다도 아들 윤겸이 중앙 관계에 진출한 것이 크게 영향을 미친 듯하다. 윤겸은 1600년 8월에 홍문록(弘文錄)에 들었고, 이해 12월에 시강원 문학으로, 1601년 1월에는 홍문관 부수찬으로 임명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평강 수령이나 아전들이 물품을 많이 지원한 것도 윤겸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오희문과 유사한 사례로 이문건과 유희춘도 있다. 이문건은 유배 중에 혼사를 치르다 보니 혼사가 결정되자 친지와 지인들에게 혼인이 정해졌다고 통보하고 부조를 청하였다. 요청을 받은 지방관과 지인들은 곡물과 각종 잡화, 혼례에 쓸 음식 등 많은 물품을 보내 주었다. 유희춘이 손자 광선의 혼례를 앞두고 직접 마련한 물품은 납채에 쓸 채단과 혼서함, 신랑 예복, 말에 필요한 물품 등이었고 나머지는 빌리거나 외부 지인들이 보내 주었다. 심지어 남원에 사는 누이의 손녀가 혼인할 때에도 본인의 부조 이외에 관리로 재직 중인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해 누이의 혼사를 도왔다.

이상의 몇 가지 사례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특징은 혼주들이 신분과 인맥 또는 특권이나 권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혼수 물자를 조달하는 모습이다. 양반은 정치적 연대나 사회·문화적 연계망을 통해 상호부조를 철저하리만큼 실천하였다. 양반들은 폭넓은 인맥을 형성해 관계를 공고히 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려고 하였다. 오늘은 자기가 도움을 주지만 내일은 자기도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므로 외부 인맥을 이용하는 모습은 기득권의 재창출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반면에 인맥이나 특권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서민은 혼례·상례를 위해 향촌 단위로 공동 기금을 마련하여 해결하였다.

물건으로 주고받던 혼인 부조는 화폐 경제가 활성화하면서 물품 이외에 현금도 등장하였다. 시기가 내려오지만 경상도 예천 박씨가의 일기에서 이러한 사실을 잘 찾아볼 수 있다. 박씨가는 1853년 1월 12일에 1전, 1865년 9월 20일에 2전, 1866년 12월 6일에 1전을 혼수 부조로 지출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