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3장 정비된 혼인, 일탈된 성
  • 2. 조선시대 혼례와 혼수
  • 첩이나 노비의 혼인식
정해은

19세기 중반 무렵에 나온 설화집 『동야휘집(東野彙集)』에는 판서 윤강(尹絳)이 나이 60이 넘어 용인에 사는 유씨의 딸을 소실로 들이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윤강은 혼례 이틀 전에 유씨가 사는 지역으로 내려가 머물렀다. 이때 윤강은 소실이 될 여자가 정실로 맞아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하자 혼서를 고쳐 써 보낸 후 정식 혼례를 올렸다. 이 이야기에서 인상 깊은 대목은 윤강이 소실을 들이기 위해 혼서도 쓰고 예식을 치르기 위해 소실 집으로 가는 장면이다. 양반이 소실을 맞아들이는 데에도 정식 혼례와 유사한 의례가 있고 예법이 존재하였다.

앞서 소개한 황윤석은 1776년 9월 11일에 부인을 잃었다. 그때 황윤석의 나이 48세였다. 일년상을 마치자 황윤석은 1777년 12월 5일에 송순(宋純)의 후손인 일좌의 이복 누이동생을 소실로 들였다. 주변에서는 황윤석에게 사서가(士庶家)의 청상과부를 첩으로 맞이하라고 권유하나 황윤석은 실절(失節)한 여자를 들이면 가문의 절개도 잃는다 하여 처녀를 사방으로 물색하였다.

이 무렵 국법에 따르면 사대부는 부인이 죽으면 3년 후라야 재혼할 수 있었다. 단, 부모 명령이 있거나 40세가 지났는데도 아들이 없으면 1년 뒤에 장가드는 것을 허락하였다.176)『경국대전』 권3, 예전(禮典) 혼가(婚嫁). 황윤석은 재혼하는 경우는 아니나 상처 후 1년을 갓 넘기자 노모의 권유와 신변상의 이유를 들어 소실을 두었다. 이 과정에서 황윤석은 첩을 들일 때에 오래 전부터 행해진 전통이라 하면서 소실 집에 예전(禮錢) 명목으로 얼마간의 돈도 보냈다.

평소 의례에 조예가 깊은 황윤석은 예법에 따라 소실을 맞기 위해 여러 문헌을 조사했으나 별달리 상고할 만한 글이 없자 당시 양반가에서 행하던 의례를 탐문하였다. 황윤석의 조사에 따르면 남자는 흑립에 푸른 도포(靑袍)를 갖추고 첩의 방에 들어가 자리를 정한 후 자세를 바르게 한다. 이윽고 첩이 될 여자가 신부 복장을 하고 들어와 네 번 절하는데, 남자는 서서 절을 받고 두 번 절할 때마다 한 번씩 소매를 들어 읍하여 답례하였다. 곧 정식 혼례 가운데 절하는 의식을 일부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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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윤석은 담양으로 가서 소실을 맞는 과정을 『이재난고』에다 「담양기행(潭陽紀行)」이라는 글로 남겨 놓았다. 1777년 12월 4일 아침에 황윤석은 사당에 절한 후 남자 종 두 명을 데리고 집을 나서 5일에 소실집에 도착하였다. 황윤석의 복장은 상을 마친 지 얼마 안 된 상황을 고려해 흑모단(黑毛段, 검은 색 모직물)으로 된 복건을 쓰고, 청저도포(靑紵道袍, 푸른 모시 도포)를 입고, 흑조대(黑漭帶, 검은 색 가는 띠)를 띠고 흰 면주로 된 행전(行纏)177)바지·고의 등을 입을 때 가뜬하게 하기 위해 무릎에서 발목까지 바지 위에 눌러 싸는 물건. 헝겊으로 소맷부리처럼 만들고 위쪽에 끈을 두 개 달아 돌려 매었다.을 하였다. 황윤석은 방 안에 들어가 위치를 정한 뒤 두 손을 마주잡고 섰다. 이윽고 첩이 들어와 먼저 두 번 절하자 황윤석이 소매를 올려 읍하여 답례 하였다. 여자가 다시 두 번 절하자 황윤석이 또 소매를 올려 읍하여 답례하였다. 절이 끝나자 첩이 황윤석에게 술을 따르는 것으로 예식을 마쳤다.

황윤석이 소실을 들이는 의례는 첩이 될 여자는 네 번 절하고 남자는 두 번 읍하는 정도였다. 정식 혼례는 아니나 예를 중시한 사대부가에서는 야합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간단한 통과 의례를 거친 후 소실을 들인 것이다. 황윤석은 이틀 밤을 소실 집에서 묵은 후 7일에 출발해 8일에 집에 돌아와 노모를 뵈었다. 그리고 9일에 사당에 알현하였다. 이로써 소실 송씨는 황윤석 집안의 일원으로 공인받았다.

노비의 혼인식은 구체적인 사례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대부분 ‘여종 눌개가 방실에게 시집갔다.’는 표현처럼 혼인 여부만 기록되어 있을 뿐 혼인 예식과 관련한 자료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문자 생활을 하지 못해 글을 남기지 못한 노비들이 양반이 작성한 문서나 서책에 등장할 때에는 대부분 재산과 노동에 관한 부분이었다. 노비 혼례 따위는 양반의 관심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증거이다. 더구나 주인가와 멀리 떨어져 있는 납공(納貢) 노비가 아닌 주인집 안팎에서 온갖 노동에 동원되는 입역(立役) 노비의 경우에 더더욱 혼례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19세기 초에 나온 야담집인 『청구야담(靑邱野談)』에는 어느 양반가의 여종 남편이 착한 마음씨로 헐벗고 굶주린 노비들을 구제하다가 보물이 쏟아져 나오는 박을 얻게 된다는 ‘택부서혜비식인(擇夫壻慧婢識人)’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야담에서 여종은 행색이 남루한 남자를 첫눈에 비범한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혼례도 없이 인정(人定)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수놓은 금침에서 함께 밤을 보낸 뒤 정식 부부가 되었다. 즉 동침만으로 부부가 되었으며 다음날 주인집에 이 사실을 알렸다.

또 경상도 예천 박씨가의 1841년 2월 14일자 일기에는 집안의 노 원옥이 아내를 맞이했다는 간단한 기록이 있다. 일기 말미에 기록된 그 해의 지출 목록에는 원옥이 백목면 25자와 솥 하나를 사기 위해 2냥 2전을 가져갔 다고 적혀 있다. 원옥은 혼인한 사흘 뒤에도 1냥을 더 가져가 혼인을 전후하여 총 3냥 2전을 썼다.178)이영훈, 「노비의 혼인과 부부 생활」, 『조선시대 생활사』 2, 역사비평사, 2000, 109쪽. 아마도 신혼살림을 장만하기 위해 주인집에서 빌려간 돈으로 짐작되는데, 혼례를 올렸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다만, 혼례가 있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예컨대 오희문은 1600년 12월 15일에 죽은 종 막정을 위해 제사를 지내 주었다. 막정은 오희문 집안에 공로가 많은 종이었다. 이러한 사례로 미루어 보아 주인과 두터운 관계가 형성된 노비의 경우에는 조촐한 혼례라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따라서 노비 혼례는 『주자가례』 등의 의식 규정에 얽매일 필요 없이 노비 당사자의 형편에 따라 그저 동침하는 것으로 그치거나 빈약한 혼례를 치르는 등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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