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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임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179)유몽인이 편찬한 설화집으로, 인간 생활의 야사·항담·가설 등을 수록하였다.에는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이 주색(酒色)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먼저 퇴계가 남명에게 “주색(酒色)은 누구나 좋아하는데, 술은 그래도 참을 수 있으나 색(色)은 참기 어려운 것이다. 자네는 색에 대해 어떠한가?”라고 하자 남명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색에 대해서는 패군장(敗軍將)이니 아예 묻지 않는 것이 좋다네.”라고 하였다. 그러자 퇴계는 “나는 젊었을 때는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더니 중년이 지나고서는 꽤 참을 수 있으니 수양한 힘이 없지는 않네.”라고 하였다.180)유몽인, 『어우야담(於于野談)』, 『시화총림(詩話叢林)』 하, 통문관, 1993, 721∼723쪽.

이를 통해 이황과 조식의 성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맹자가 “식색의 욕구는 인간의 본성이다(食色性也).”라고 했듯이 성욕은 식욕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 중의 하나인 것이다. 즉, 성은 인 간의 본성으로 신분의 고하나 남녀의 구별 없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다만 표출 방식에 있어 차이가 나는 것은 각자가 위치한 사회적 지위와 그에 따른 법적 규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적·법적으로 인간을 다양하게 계층화하였던 조선시대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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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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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 남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외정(外情)181)외정은 16세기 일기 자료인 『묵재일기』에서 이문건의 처 김씨와 남편 이문건의 대화에서 따온 말이다. 김씨는 이문건이 연일 기생과 더불어 술자리에 참석하자 “당신이 외정이 없다면 내가 감히 어찌 투기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묵재일기』 1552년 11월 9일). 여기에서 외정은 남편이 ‘본처 이외의 여성에게 몸과 마음을 주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 양반 남성의 성적 탐닉을 표현하는 용어로 매우 적절하다고 여겨진다.을 접할 수 있었다. 이들은 본처 이외에 하층 여성의 성을 배타적으로 향유하고 있었는데, 구체적인 대상은 기녀와 비이다. 조선시대의 기녀(妓女)는 최고의 예인 집단이면서 최하의 국역(國役) 담당층이라는 양면성을 동시에 지닌 신분 계층이다. 이들은 기예를 익혀 여악(女樂)을 담당하였는데, 여기에는 성적인 서비스까지 포함된 것이다. 기녀가 상대하는 계층이 최상층인 양반인 만큼 이들은 시서(詩書)에 능숙하였고, 이들의 성은 누구나 공유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기녀는 기(妓)·여기(女妓)·창녀(娼女·倡女)·창기(娼妓·倡妓)·기생(妓生) 등으로 불리었다. 이들은 소속처에 따라 서울 장악원 소속의 경기(京妓)와 지방 관아 소속의 관기(官妓)로 구분된다. 그러나 인조 때 경기가 폐지되면서 국가에서는 필요할 때마다 지방 관아에서 관기를 뽑아서 충원하였고, 변방에서는 관비가 관기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기녀의 충원 방식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지만 관비 중에서 자색(姿色)이 뛰어난 자와 재예(才藝)를 갖춘 자를 선발한 것이 가장 전형이다. 즉, 관기의 모집단이 관비이므로 관기는 관비의 일종인 것이다. 이들의 입역 체제는 관노비와 마찬가지로 입번제(入番制)였을 것으로 보인다.182)이들의 입역 체계를 확인할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16세기 중앙 관아에 소속된 시노의 입역 체제가 ‘3번6삭상체(三番六朔相遞)’로 3월에서 8월(하절기), 9월에서 다음해 2월(동절기)까지로 3인1조가 되어 6개월씩 교대로 입번하도록 규정되었다. 관기의 입역 체제도 이와 유사하였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이성임, 「16세기 조선 양반 관료의 사환(仕宦)과 그에 따른 수입(收入)」, 『역사학보』 145, 1995). 입번제란 일정 인원이 한 조가 되어 교대로 역을 지는 것을 말한다. 이들 관기는 입번하지 않는 동안(非番) 개인적으로 사설 영업장에서 영업을 할 수도 있었다. 또한 16세기까지만 하여도 서울의 경기에게는 봉족(奉足)이 지원되고 있었다. 이들 관기는 나이 50이 되어야 역에서 물러났다. 즉 퇴기(退妓)란 나이 50이 넘어 국역에서 제외된 기녀를 말한다.183)이성임, 「16세기 양반 관료의 외정-유희춘의 『미암일기』를 중심으로-」, 『고문서연구』 23, 2003.

기녀 문화는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황진이(黃眞伊, ?∼?)의 수려한 시 구절을 외우고, 한 남자를 향한 매창(梅窓, 1573∼1610)의 절제된 사랑과 왜장을 안고 강물에 뛰어든 논개(論介, ?∼1593)의 절의를 그리워한다. 다음은 서경덕(徐敬德, 1489∼1546)184)황진이·서경덕·박연 폭포를 ‘송도 삼절’이라 한다.·벽계수 등 많은 이와 염문을 뿌린 황진이의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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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 폭포
박연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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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하리.

이 시는 상징성이 뛰어난 정제된 작품이다. ‘푸른 계곡의 물이여, 무엇이 급하여 그리 서둘러 가는가. 밝은 달 아래서 천천히 놀다가 가는 것이 어떠한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재치 넘치는 노래와 시, 가야금 소리에 콧대 높은 벽계수라 하여도 뿌리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기녀가 가지고 있는 문학적 기질은 양반과 은밀한 사랑을 나누기에 충분하였다. 따라서 이들을 가리켜 말을 알아듣는, 말을 이해하는 꽃이라는 의미에서 해어화(解語花)라 부른다.

그러나 이들의 성은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공적인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다소 외설스러운 시도 전한다.

이내 손은 문고리인가

이놈도 잡고 저놈도 잡네

이내 입은 술잔인가

이놈도 핥고 저놈도 핥네

이내 배는 나룻배인가

이놈도 타고 저놈도 타네.

이 시에서는 뭇 남성을 상대해야 하는 기녀의 공공성을 외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기녀의 성은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천박한 것이어서 정절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던 성리학적인 사회 구조에서 천시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기녀는 사람 부류로 취급되지 못하였으며, 누구나 쉽게 취할 수 있다고 하여 노류장화(路柳牆花)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들의 행색(行色)을 가리켜, 잔치를 할 때면 분을 얼굴에 두껍게 바르니 모양이 마치 가면을 쓴 것과 같다고 묘사하였다.

이들 기녀도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을 수도 있으나, 이들의 혼인은 매우 불안정한 것이었다. 비록 남편이 있더라도 지속적으로 입역해야 하므로 이들의 관계가 소원해질 가능성은 상당히 높았다.

기녀는 국가의 공물(公物)이므로 양반이 데려다 첩으로 삼는 것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지방관이 자신이 데리고 있던 관기를 데려다 첩으로 삼는 솔휵(率蓄) 행위가 상당히 만연하였다. 그리하여 웬만한 재신(宰臣)과 조관(朝官)은 기생을 데리고 살았으며, 이름난 기생은 모두 사대부의 첩이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즉, 관찰사부터 도사·어사·수령·첨사·만호·훈도·교수·군관, 수령의 자제, 토호 품관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인원이 이러한 풍조에 적극 가담하였다. 1630년에 사헌부에서 함경도와 평안도 지역의 관기를 솔휵한 자들을 조사하자 모두 43명이 적발되었다.185)『선조실록』 권202, 선조 39년 8월 계해, 갑자. 조선시대 내내 관기의 솔휵이 커다란 사회 문제화되어 솔휵자의 처벌 과 관기의 쇄환(刷還)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문제를 근절시키기 어려웠고 지방 관아에 소속된 관기의 외부 유출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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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능신영도 중의 기녀
안능신영도 중의 기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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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능화(李能和)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나 일기 자료에는 기녀와의 사랑 놀음과 지방관의 솔휵 과정이 적잖이 보인다. 16세기 경상도 성주에는 이천택(李天澤)이라는 혈기 방장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문인인 이충건(李忠楗, ?∼1521)의 손자로 종조인 이문건(李文楗, 1494∼1567)에게 수학하기 위하여 성주에 내려와 있었다. 그는 성주의 유명한 호색한(好色漢)으로 그와 관계한 여성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그는 수시로 기방을 출입할 뿐만 아니라 각종 연회에 참석하여 기생과 가무를 즐기곤 하였다. 천택이 관기를 두고 벌인 사랑 놀음은 『경산지(京山誌)』 「명신조(名臣條)」에 실리기도 하였다.

천택은 주리(州吏, 지방 군현의 향리)인 백한(白澣)이 아끼는 관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백한이 천택을 칼로 위협하면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천택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에 백한은 사과하며 “뒷날 공은 귀인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후에 천택이 성주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알게 된 백한은 도망치려다가 천택이 관대하다는 생각에 도망하지 않았다. 그러자 천택도 백한을 향역(鄕役)에서 면제시켜 주었다.186)『경산지(京山誌)』 권3, 명신조(名臣條).

이 이야기는 지방지 명신조에 등재될 만한 내용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실린 것은 천택의 신분 변화가 주된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천택이 문과에 급제해 성주 목사로 부임하게 되자 젊었을 때 벌인 사랑 놀음이 호방한 지방관의 위용으로 바뀌었다. 이 이야기는 관기를 사이에 두 고 벌인 사랑 놀음이라는 점에서 『춘향전』과 유사한 측면이 많다. 다만 상대가 수령이 아니라 향리라는 점인데, 기녀와 관련된 공적인 업무를 향리가 담당한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가 더욱 설득력이 있다.187)이성임, 「조선 중기 양반의 성 관념과 그 표출 양상」, 『조선시대 사회의 모습』, 집문당,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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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료와 기녀의 관계는 『대명률』 ‘관리숙창율(官吏宿娼律)’188)『대명률』 권25, 형률 간범(姦犯) 관리숙창(官吏宿娼).에 규정되어 있다. 그 내용은 창기의 집에서 자는 관리는 장 60에 처한다는 것으로서, 이는 관리의 자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는 중앙의 관직자뿐만 아니라 지방관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따라서 관기와 잠자리를 같이하거나 개인적으로 취하는 행위는 합법이 아니다. 관기는 수령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방관의 잠자리 시중을 그 지역의 관기가 드는 것은 상당히 보편화된 현상이었고, 이들 사이에 사랑과 연애의 감정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조선해어화사』에 적잖게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아들 전인(全仁)의 출생 과정은 잘 알려져 있다. 이언적이 경주 부윤 시절에 미모가 뛰어난 한 관기를 가까이 한 적이 있었다. 이들 사이에 아이가 잉태되었으나 아버지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상경하자, 어미는 자신을 아끼던 병사 조윤손(曹潤孫)의 첩으로 들어갔다. 얼마 뒤에 아이가 태어나자 이름을 옥강(玉剛)이라 하였다. 이제 옥강은 조윤손의 아들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윤손이 사망한 뒤에 적모와의 갈등이 벌어졌고, 이 와중에서 옥강은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된다. 즉, 자신의 생부가 조윤손이 아니라 이언적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길로 옥강은 강계에 유배된 이언적을 찾아갔고, 이언적은 옥강에게 전인(全仁)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어 아들로 삼았다. 그 뒤 전인은 아버지에게 수학하면서 뒷수발을 담당하였고 이언적이 사망하자 3년상을 치름으로써 아들의 도리를 다하였다.189)이능화, 『조선해어화사』, 동문선, 1992.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1571년에 전라 감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부인과의 관계도 상당히 원만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성 유배 시절에 얻은 젊은 첩도 있어 그리 아쉬울 것이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유희춘이 전라 감사로 임지를 순행하는 동안에 유숙지에서는 관기가 방기(房妓)190)방기(房妓)·방직 (房直)·방직기(房直妓) 등으로 통용된다.로 제공되었다. 이들 방기는 천침기(薦枕妓)·창기(娼妓)·차비(差備)191)경중 각사, 궁궐에서 잡역에 종사하던 노비·공노비의 별칭이다.·시아(侍兒) 등으로 불렸는데, 방기·천침기·창기는 시침을 드는 관기를 일컫는 것이고, 차비는 역을 지는 관노비를 말하는 것이다. 시아는 단순히 시중드는 아이라는 의미이다. 이들을 부르는 호칭은 서로 다르나 하는 일이 달랐던 것은 아니다. 이들 기녀는 향명(鄕名)과 기명(妓名)이 따로 있었다. 향명은 기녀가 되기 전의 이름이고, 기명은 기생이 되면서 얻은 것이다. 향명과 기명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관기가 관비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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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 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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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춘은 전라 감사 시절에 광주 관아 소속의 연(燕)과 전주 관아 소속의 옥경아(玉瓊兒)를 가까이 하였다. 특히 옥경아는 유희춘이 가장 아끼던 정인(情人)이었다. 그녀는 전주 관아 소속으로 비록 나이는 있었으나(33세) 용모와 가창력이 뛰어났다. 유희춘은 옥경아와 한동안 즐거운 시절을 보냈다. 옥경아에게 자신이 지은 시를 불러보게 하는가 하면 그녀의 이름자를 따서 시를 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관기와의 관계는 ‘꽃구경(賞花)’에 불과하였다. 이들의 관계는 일시적이어서 지방관의 교체와 함께 해소되게 마련이었다. 관기는 지방 관아에 소속되어 있어 원칙적으로 관내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유희춘은 전라 감사로 부임한 지 8개월 만에 사헌부 대사헌으로 승차(陞差)된다. 그야말로 정들자 이별인 셈이다. 결국 두 사람은 삼례역에서 아쉬운 이별을 고하였고, 옥경아는 유희춘에게 몇 차례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박순(朴淳, 1523∼1589)은 전주 관아 소속의 준향(峻香)을 솔휵하였다. 박순이 준향을 만난 것은 1571년 전주에서였다. 실록봉안사로 잠시 내려갔다가 자신의 수발을 들던 준향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이에 곧바로 솔휵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상경한 후에도 백방으로 노력하여 뜻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유희춘은 박순을 가리켜 “몸도 쇠약한 처지에 정력을 낭비하려 한다.”며 걱정하고 있다.192)이성임, 「16세기 양반 관료의 외정-유희춘의 『미암일기』를 중심으로-」, 『고문서연구』 23, 2003. 나이든 처지에 젊은 첩을 얻었다가 건강을 상하는 경우가 적잖았기 때문이다.

변방에서 수자리를 서던 무과 출신자에게도 관기가 방직기(房直妓)로 제공되었다. 『부북일기(赴北日記)』는 17세기에 박계숙(朴繼叔)·취문(就文) 부자가 변방에서 수자리를 섰던 기록이다. 박계숙은 함경도 회령부와 경성에서, 그리고 박취문은 함경도 회령 포을하진에서 수자리를 섰다. 이들은 근무지에서 방직기를 배정받아 숙식을 해결하였는데, 이는 군관들이 객지 생활을 유지하던 방편이었다. 이들 방직기는 기녀에서 충원되었으나 결원이 생기면 사비(私婢)로 충당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군관에게 매월 지급되는 양식을 받아 함께 생활하였으며, 방직기의 어미가 이들의 생활을 도왔다. 이들의 관계가 일정 기간 지속된다는 점에서 방직기는 일종의 ‘현지첩’이었다. 한 사람의 복무 기간이 끝나 떠나게 되면 또 다른 사람을 맞이하여 살아가는 것이 변방 관기의 일상이었다.193)우인수, 「『부북일기』를 통해 본 17세기 출신 군관의 부방 생활」, 『한국사연구』 96, 1997.

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잠자리를 같이하면서 자연스레 운우지정(雲雨之情)이 생겨나게 마련이었다. 박계숙과 회령 기생 배종은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다. 배종이 박계숙의 방기는 아니었지만 이들의 관계는 1년 이상 지속되었다. 그러나 박계숙이 수자리 생활이 끝남으로써 이들의 관계는 해소되었다. 그 뒤 배종은 월매라는 딸을 출산하게 된다. 그녀가 누구 소생인지 확 인할 수 없지만 배종은 어린 딸에게 박계숙의 존재를 끊임없이 인지시켰다.194)자료상으로는 확인되지 않지만 월매의 아버지는 박계숙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월매는 박취문의 얼매(孼妹)가 된다. 월매는 수천리 밖 변방에서 박계숙의 존재를 인지하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들의 인연은 40년 뒤에 자식대로 이어졌다. 배종의 딸 월매는 회령에 새로 배치된 군관이 울산에서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 나섰다. 월매는 이것저것 물어 박취문이 꿈에 그리던 박계숙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당시 배종은 이미 사망한 뒤였고 박계숙은 70을 넘긴 나이였다. 월매는 박취문을 만난 날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면서 죽은 어머니를 회상했다. 그 뒤 이들은 박취문이 회령을 떠나기까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변방의 기생 모녀와 수자리를 섰던 군관 부자의 만남은 변방의 기생 사회에서 가능한 기이한 인연이다.195)우인수, 「조선 후기 북변 기생의 생활 양태」, 『역사와 경계』 48, 2004.

종친에서부터 문무관에 이르기까지 양반 관직자의 기녀 솔휵은 커다란 사회 문제였다. 이는 지방관의 수발을 관기가 담당한 데서 오는 제도적인 문제였다. 이에 국가는 솔휵자에 대한 처벌과 관기의 쇄환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으나 이는 문제를 근절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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