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3장 정비된 혼인, 일탈된 성
  • 3. 불안정한 사랑 그리고 성
  • 자유분방한 남성
  • 비는 갓김치종
이성임

양반 남성의 또 다른 성적 대상은 비(婢)이다. 비는 국가 기관이나 관아에 소속된 공비(公婢)와 개인에게 소유권이 있는 사비(私婢)로 나뉜다. 노비의 주인들은 비의 혼인 여부와 관계없이 비의 성을 꺼릴 것 없이 농락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남편과의 잠자리를 강제로 분리시킬 수도 있었다. 비는 마음먹기에 따라선 언제든지 취할 수 있는 손쉬운 상대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양반 처지에서 볼 때 그들은 그다지 매력적인 상대라고 하기는 어렵다. 기녀처럼 시문으로 소통하고 연민의 정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비는 관기보다 다소 쉬운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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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성적 특성은 이륙(李陸, 1438∼1498)의 『청파극담(靑坡劇談)』을 통해 확인된다. 15세기 말 쯤의 일이다. 맹씨 성을 가진 재상이 밤마다 부인이 잠들고 나면 비의 방을 찾아들었다. 하루는 부인이 몰래 뒤따라가 방 안의 수작을 엿들었다. 비가 상전을 꾸짖어 말하길 “절편 같이 고운 부인을 두고 이 누추한 종을 능욕하는가?”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맹 재상이 답하기를 “나는 너를 갓김치로 여긴다. 즉, 절편을 먹을 때 갓김치를 곁들여 먹어야 맛이 난다는 뜻이다.”라 했다. 재상이 방에 들어오자 부인이 어디 갔다 왔 느냐고 물었다. 재상이 배가 아파 변소에 다녀왔다고 하자 부인이 농하기를 “대감이 갓김치를 너무 많이 먹어 배탈이 났구려.” 하였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에서는 비를 ‘갓김치종’으로 불렀다는 속언까지 전해온다. 노비주가 부인의 묵인 아래 비의 성을 꺼릴 것 없이 농락한 15세기 말 풍속도의 한 단면이다. ‘종년 간통은 누운 소 타기보다 쉽다’는 속담도 이처럼 주인이 비의 성을 제 마음대로 지배한 데서 나온 말이다.196)이영훈, 「노비의 혼인과 부부 생활」, 『조선시대 생활사』 2, 2000, 102∼104쪽.

16세기 성주에 유배 중인 이문건 집안에는 향복(香福·香卜)이라는 비가 있었다. 그녀는 어미인 삼월(三月)과 같이 이문건 집안에서 사환(使喚)되던 비였다. 향복은 15∼16세의 여종으로 그녀가 주로 하는 일은 이문건 옆에서 개인적인 수발을 드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향복은 누군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문건은 향복이 소리쳐 거절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상대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가(下家)197)당시 이문건의 거처는 상당(上堂)과 하가(下家)로 구성되어 있었다. 상당에는 이문건이 거처하였고, 하가에는 이문건의 가족이 거주하고 있었다.로 내쫓아 버린다. 개인적으로는 성폭행을 당한 여종이 자신의 수발을 든다는 것이 불쾌하였을 수도 있다. 그 뒤 어미인 삼월이를 통해 성폭행의 전모가 밝혀진다. 삼월이가 향복을 불러 자세한 내막을 캐묻자 그녀는 자신을 범한 상대는 도령이며, 도령이 세 차례에 걸쳐 자신을 범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도령이란 결혼을 하지 않은 남자 상전으로 이문건 집안에서는 천택을 가리킨다. 그러나 천택은 이 사건으로 인해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는다. 이문건은 그저 천택을 불러 색(色)을 가까이 하면 학업에 지장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문건의 생각에는 천택이 향복을 범한 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지만 이로 인하여 공부에 지장을 받지 않을까 하는 것이 염려스러웠다. 그 뒤 관노 온석(穩石)이 밤마다 담을 넘어와 향복과 간통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문건은 온석을 때려 내쫓았다. 이문건의 생각에는 온석과 향복이 통간하였다 하여 혼인시키는 것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그 뒤 향복은 아비가 누구인지 모르는 딸을 출산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인지(認知)198)자신의 자식임을 인정하는 절차. 지금의 호적법에서도 혼인 외의 자식인 경우에는 인지 절차가 필요하다.하지 않았으며, 결국 이 아이는 아비가 누구인지 모른 채 어미와 함께 이문건의 비로 사환될 수밖에 없었다. 설사 아비가 누구인지 밝혀진다 하여도 소유권은 이문건에게 있었다.

양반가에서 소유한 노비 가운데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증식된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양반에게 비의 정조는 상대적으로 존중할 가치가 없는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오희문 집안에서 일어난 노비 간의 간통 사건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도중인 1595년 당시 충청도 임천에서 피란살이를 하던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의 집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그 해 봄부터 집안의 노 송이는 비 분개와 은밀한 사이가 되었다. 비 분개는 오희문가의 종 막정의 처였으니 둘의 관계는 화간(和姦)이었다. 이윽고 송이와 분개가 막정이 출타 중인 어느 날 도망을 결행하자 이를 눈치 챈 오희문이 분개를 잡아 방에 가두었다. 미리 도망친 송이는 분개가 갇히자 밤중에 그 방에 접근하여 방구들을 파고 그녀를 구출하려 하자 오희문은 좀 더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하여 분개를 관아에 넘겨버린다. 집에 돌아와 그 사실을 알게 된 막정이 식음을 전폐하자 오희문은 할 수 없이 분개를 데려온다. 그러나 아내를 다시 맞은 막정은 아내의 부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기뻐하여 마지않는다. 그렇지만 결국 분개는 자신을 데리러 온 송이와 영영 도망치게 되고 크게 상심한 막정은 얼마 있지 않아 병들어 죽는다. 오희문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비 하나가 꼬리를 치니 노 하나가 도망치고 다른 노 하나가 죽었다고 개탄하였다.199)이영훈, 「노비의 혼인과 부부 생활」, 『조선시대 생활사』 2, 2000, 110∼111쪽. 결국 오희문의 관심은 노비의 간통보다는 이에 따른 재산상의 손실에 있었던 것이다.

천한 비는 필요에 따라 존장(尊丈)의 잠자리에 제공되기도 하였다. 성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이문건은 같은 성씨인 이민즙(李敏楫)이 준비한 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연회가 끝나자 이민즙은 자신의 비인 강지(姜之)에게 이문건의 시침(侍寢)을 들게 하였다. 이는 유희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선조 원년 유희춘은 가토(加土)200)가토(加土)는 선대(先代)의 분산(墳山)을 잘 다듬는 것을 말한다.하러 해남으로 귀향하여 좌수 이사겸 (李士兼)의 집에 머무른다. 그러자 이사겸은 유희춘을 극진히 대접하는 차원에서 성대한 술자리를 마련하고, 이어 자신의 비 소애(小艾)에게 잠자리 시중을 들도록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성적 대상을 제공하는 것을 상대에 대한 최고의 예우라고 생각하였다.201)이성임, 「16세기 양반 관료의 외정-유희춘의 『미암일기』를 중심으로-」, 『고문서연구』 23, 2003.

양반 남성이 비의 성을 꺼릴 것 없이 농락하는 풍조는 조선시대에 보편화된 사회 현상이었다. 이는 양반 여성과 비의 성은 엄격히 구별되며, 비의 성은 상대적으로 보호할 가치가 없다는 생각에 기인한다. “예는 서인(庶人)에게까지 내려가지 않고 형은 대부(大夫)에게까지 올라가지 않는다.”는 옛사람들의 생각도 이러한 현상과 맥을 같이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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