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3장 정비된 혼인, 일탈된 성
  • 3. 불안정한 사랑 그리고 성
  • 다양한 애정 행각, 간통과 성폭행
  • 최고의 러브 스토리
이성임

세종 때 함경도 관찰사를 지낸 이귀산(李貴山)의 처 유씨(柳氏)와 지신사(知申事) 조서로(趙瑞老)의 간통 사건은 조선을 대표하는 러브 스토리이다. 애당초 유씨는 조서로와 먼 친척이었는데,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비구니가 되어 조서로의 어머니 집에 출입하다가 조서로의 나이가 14세가 되자 드디어 사통하였다. 조서로의 어머니가 이것을 알고 몹시 미워하니, 유씨 가 이로 인하여 다시 가지 못하다가 뒤에 머리를 기르고 이귀산에게 시집갔다. 조서로는 자주 이귀산의 집을 찾았다. 이귀산이 늙어 아내를 몹시 사랑하였고, 조서로가 아내의 친척이 된다고 하여 후히 대접하였다. 때로는 침실로 맞아들여 술자리를 벌이고서 아내에게 술을 권하기도 하였다. 유씨는 문자와 장기·바둑 등을 약간 해득하였는데, 손수 쓴 글을 은밀히 보내어 약속하기를 “목복(木卜)의 집에서 만나 울울하게 맺은 정을 풀기 바란다.” 하였으니, 목복은 곧 박(朴) 자로서, 누이동생의 아들인 박동문(朴東文)을 말한다.202)『세종실록』 권22, 세종 5년 10월 을묘.

얼핏 보기에 보통의 간통 사건과 다를 것이 없지만 두 사람이 각기 혼인 전부터 사귀었으며, 부모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하였다가 혼인 뒤에도 잊지 못하여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점이 일반 간통 사건과 다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보아 유씨 쪽에서 다시 만나는 데에 더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울울하게 맺은 정’이라는 표현이 사랑을 이룰 수 없는 현실의 안타까움을 절실히 드러내고 있다. 유씨의 이러한 태도는 유씨가 자신의 감정에 매우 충실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사건은 1423년 10월 결국 유씨를 참형에 처하고 조서로를 영일로 귀양 보내는 것으로 결말을 짓는다. 세종은 이들의 죄가 강상(綱常)을 범한 것이라 하여 유씨를 3일 간 저잣거리에 세웠다가 목을 베었다고 한다. 법 규정대로라면 장 90에 그쳐야 하나 양반 부녀자의 간통이라는 점에서 가중 처벌되었던 것이다.203)이순구, 「조선시대 성 규제와 여성 성 의식의 변화」, 숙명여대 한국 문화연구원 발표문, 2001.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