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3장 정비된 혼인, 일탈된 성
  • 3. 불안정한 사랑 그리고 성
  • 첩이 되는 여자들
  • 첩을 들이는 이유
이성임

조선시대 혼인 제도는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이나 이는 순수한 의미의 일부일처제가 아니라 축첩(蓄妾)을 용인하는 것이었다. 특히 양반 남성은 본처가 살아 있어도 양인 이하의 여성을 첩으로 맞아들이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들은 첩·소실·측실·부실·후실 등으로 부른다.

조선 초기 사대부 계층에는 고려 말기 이래의 다처병축(多妻竝蓄)에 의하여 동일한 계층의 처가 여러 명 존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에 국가에서는 ‘예에는 두 명의 적처가 없다(禮無二嫡).’에 따라 일부일처제를 확고히 하였다. 즉, 본처는 한 명으로 규정하고 나머지 부인들은 첩으로 삼았다. 동일한 계층의 부인을 여러 명 두는 행위를 중혼 행위로 규정하고 중혼자를 처벌하는 것은 물론 후처를 강제 이혼시키거나 첩으로 정하여 그 소생에게 불이익을 주었다. 그러나 양반 계층의 후처가 첩으로 정해지면 자신과 그 혈족은 가정에서의 위치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도 하락하게 된다. 자손은 재산 상속에서 불이익을 받을 뿐만 아니라 관직 진출의 길이 막히게 되었다. 따라서 처첩(妻妾)과 적서(嫡庶)를 서열화하는 과정에서 많은 갈등 요소가 드러났고 이에 따른 파문도 적지 않았다.

조선 초기 개국 공신 조영무(趙英茂, ?∼1414)의 아들 전(琠)과 이(理)의 갈등 관계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조영무의 두 부인 김씨와 강씨는 동일한 계층의 여성이었다. 강씨가 고려 말기에 작위를 받았으나, 조선 초기에 들어서는 전처가 본처로 인정되었다. 그러자 강씨의 아들 이는 자신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형인 전을 첩의 자식이라 할 뿐만 아니라 사당에 모신 김씨의 신주도 없애 버렸다. 이에 사간원에서는 인륜을 무너뜨렸다는 이유로 이를 장 100대와 도 3년에 처하였다.214)마르티나 도이힐러, 이훈상 옮김, 『한국 사회의 유교적 변환』, 아카넷, 2003, 327∼3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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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제주 호적 중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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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중혼 행위가 확인되면 불이익을 당하였기 때문에 양반들은 다른 여자를 취하고 싶을 때에는 첩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중혼이 불가능하게 되자 양반 여성으로서 첩이 되는 사례는 점차 사라졌다. 따라서 첩이 되는 사람은 양인 여성과 최하층인 천인 여성으로 한정되어 갔다.

그러면 조선시대 첩은 어느 정도 존재하였을까? 이들은 비정상적인 혼인 형태를 취하고 있어 자료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나마 호적류에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다. 구한말 관직자가 많이 살았다고 하는 한성부 북부 호적에는 현직자의 18.6%가 첩을 두었던 것으로 확인된다.215)조은·조성은, 「한말 서울 지역 첩의 존재 양식-한성부 호적을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61, 2004. 경상도 단성현의 경우는 양반호의 2% 정도가 첩을 둔 것으로 나타난다.216)정지영, 「조선 후기 첩과 가족 질서-가부장제와 여성의 위계-」, 『사회와 역사』 61, 2004, 13∼14쪽. 그러나 호적 은 부세 수취와 역을 징발하기 위한 공문서이므로 첩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등재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호적에 등재된 것보다 훨씬 많은 첩이 존재하였을 것이다.

첩의 규모는 첩 자손의 존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18세기 이전의 족보에 첩은 등재되지 않지만 그들의 자식인 서자녀가 등재되고 있다. 족보와 호적을 비교·검토하여 본 결과, 18세기 경상도 단성현에 거주한 상산 김씨 집안의 적서 비율은 76대 24였으며,217)이성임, 「18세기 단성현 상산 김씨의 혼인 관계」, 『조선 후기 지역 사회의 구조와 갈등 양상-진주·제주권을 중심으로(Ⅰ)-』,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2004. 안동 권씨 집안의 적서 비율은 72 대 28이었다.218)권내현, 「조선 후기 동성 촌락 구성원의 결혼 양상-단성현 신등면 안동 권씨 사례」, 『조선 후기 지역 사회의 구조와 갈등 양상-진주·제주권을 중심으로(Ⅱ)-』,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2005.

물론 양반가에 한정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지만 첩 자손의 비율이 25∼30%를 정도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첩 자손이 많다는 것은 첩의 비율도 결코 낮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이러한 축첩 현상은 무엇에 연유하는 것일까? 우선 조선시대 사람들이 남성이 첩을 얻는 것에 대해 매우 관대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중국 고전에 영향 받은 바가 적지 않다. 즉, 제후(諸侯)는 한 번에 아홉 명의 여성을 취할 수 있었고, 경(卿)이나 대부(大夫)는 한 명의 처와 두 명의 첩, 그리고 사(士)는 한 명의 처와 다른 한 명의 첩을 취할 수 있다고 하였다.219)반고, 신정근 옮김, 『백호통의』, 소명출판, 2005. 조선의 성리학 신봉자들은 이러한 관념을 적극 수용하여 그들의 생활에 내면화하였다. 따라서 대부분의 양반 남성들은 첩을 얻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행위를 자신의 능력이나 남성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호기로운 행위로 여겼다.

양반 관직자의 경우 혼인 후 부부의 동거율이 상대적으로 높지 않다는 것도 이유가 된다. 유희춘 내외는 결혼 후 40년 이상을 해로하였지만 함께 생활한 기간은 절반에 미치지 못하였다. 유희춘이 상경하여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부인 송덕봉(宋德峰)은 향리에 남아 가사 전반을 관리 감독하였다. 이러한 형태가 양반 관료의 일반적인 거주 형태였던 것이다. 부인과 떨어져 있는 동안 남편에게는 개인적인 수발을 담당할 또 다른 여성이 필요하 였다. 이 때 양반 남성은 첩이나 관기 등과 함께 생활하였으며, 혼자서 생활한 기간은 길어야 2∼3개월에 불과하였다. 1570년 6월 서울에서 관직 생활을 하던 유희춘은 부인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는 자신이 몇 달 동안 독숙(獨宿)하며 잘 견뎌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부인에게 호되게 반박을 당하지만, 위의 사실로 미루어 조선시대에 양반 남성이 혼자 생활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220)이성임, 「16세기 양반 관료의 외정-유희춘의 『미암일기』를 중심으로-」, 『고문서연구』 23, 2003.

그리고 여성에 대한 계층화 문제를 들 수 있겠다. 양반 남성은 여성을 존비와 귀천을 기준으로 서열화하였다. 이들은 상층 여성의 성은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존중해 주어야 할 대상인 반면, 하층 여성의 성은 보호할 가치가 없는 하찮은 것이라 여겼다. 따라서 양반과 하층 여성의 결합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또한 하층 여성 가운데는 양반의 첩이 되어 유족한 생활을 기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층 여성에게 있어 양반 남성의 첩이 된다는 것은 일종의 신분 상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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