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3장 정비된 혼인, 일탈된 성
  • 3. 불안정한 사랑 그리고 성
  • 첩이 되는 여자들
  • 첩 들이기
이성임

조선시대 올바른 혼인이란 중매를 통해 가문과 가문이 결합하는 것이다.221)반고, 신정근 옮김, 앞의 책, 386쪽. 그러나 첩은 일반적으로 본처가 있는 상황에서 들이는 비정상적인 혼인 형태이므로, 들이는 방법에 있어서도 차이가 많았다. 첩도 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었다. 즉, 이들 가운데는 양반가에서 성장한 얼녀(孼女)222)서얼(庶孼)은 첩의 자식을 일컫는 용어이다. 특히 서자녀는 어미가 일반 양인이며, 얼자녀는 어미가 천인이다.에서부터 관아에서 남성의 성적인 수발을 담당하던 기녀까지 그들의 계층 구조는 다양하였다.

유희춘이 전라 감사에서 대사헌으로 승차되자, 전주 부윤 남궁침은 유희춘에게 그동안 아끼던 전주기 옥경아를 데려갈 것을 권유한다. 옥경아도 간절히 원하는 바였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장악원에 소속된 경기(京妓)의 봉족(奉足)으로 차정(差定)하면 가능하였다. 그러나 유희춘은 이 일로 사간원이나 사헌부에서 탄핵을 받을까 두려워 거절한다. 조정에서는 관기를 축 첩하는 행위를 상당히 제한하였다. 관기를 첩으로 들일 경우 국역 체제에 손실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를 제한하기 위해 방기의 솔휵 여부를 포폄(褒貶, 관리의 인사고과)에 반영하였다.223)『묵재일기』 1556년 5월 29일.

양반은 비를 첩으로 들이기도 한다. 비는 기녀에 비해 그리 매력적인 상대는 아니었지만 쉽게 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양반과 비의 관계는 일상적인 것이지만, 관계를 가졌다 하여 곧바로 첩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비가 임신하였을 경우 첩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양반의 자식을 잉태한 하층 여성은 첩으로 신분이 상승할 가능성이 높았다. 유희춘의 아들 경렴이 복수(福壽)를 축첩하는 시기도 그녀가 자식을 임신하였을 때였다.

양반가의 얼자녀(孼子女)를 첩으로 취할 수도 있었다. 이들은 혼인에 임박하여 속량(贖良)을 하여도 양반가의 본처로 출가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즉, 이들은 신분내혼(身分內婚) 규정에 따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과 혼인을 하든지, 아니면 양반의 첩으로 출가할 수밖에 없었다. 유희춘은 종성에서 축첩한 무자(戊子)와의 사이에 네 명의 얼녀를 두었다. 이들은 혼인하기 전에 속량의 절차를 마쳤지만 양반의 본처로 출가하지 못하고 무반(武班)의 첩으로 출가하였다. 법적으로는 양인이 되었지만 관념적으로는 여전히 얼산(孼産)이라는 사회적 인식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224)구완회, 「조선 중엽 사족 얼자녀의 속량과 혼인 : 『미암일기』를 통한 사례 검토」, 『경북사학』 8, 1985.

처를 사별한 양반이 다시 정혼하지 않고 첩을 얻어 생활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양반 남성의 경우 부인과 사별 이후 재혼 상대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재혼할 때 혼인한 경력이 있는 과부를 상대로 취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녀로서 전처와 엇비슷한 가격(家格)을 소유한 혼처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과부를 재혼 상대로 정하거나 상대의 반격(班格)을 낮출 경우 향촌에서 차지하는 사회적 지위가 하락할 가능성이 높았다.225)김건태, 「18세기 초혼과 재혼의 사회사-단성 호적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51, 2004. 이는 『이재난고』를 남긴 황윤석(黃允錫, 1729∼1791)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황윤석은 부인이 사망하자 정혼 상대를 구하지 않고 대신 첩을 들이기로 한다. 이곳저곳 수소문한 결과 송순(宋純, 1493∼1582)의 후손을 첩으로 들였 다. 나이 50이 다 된 넉넉하지 않은 시골 양반이 새로운 혼처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 첩을 취하게 되었다.

하층민의 경우는 양반과 달리 처첩의 구분이 그리 명확하지 않다. 조선 중기 양인이던 박의훤(朴義萱)의 사례를 통해 그 실태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박의훤은 모두 다섯 명의 처를 얻었는데, 본처에서 네 번째 처까지는 다른 남자와 간통하여 떠나갔다. 제일 마지막에 얻은 여배(女陪)만이 박의훤과 오랜 기간 정상적인 혼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분재기에는 첫 번째 처만을 본처로 하고 나머지 처는 차처(次妻)라고 하였을 뿐 계층이나 결혼 순서에 따라 처와 첩으로 구분하지 않았다.226)문숙자, 「양인의 혼인과 부부 생활」, 『조선시대 생활사』 2, 2000, 91∼97쪽. 하층민에게 양반과 같은 처첩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것은 이들이 관직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거의 없었으므로, 혼인할 때 사회적 공인도나 적서의 구분이 상대적으로 절실하지 않았다.

양반 남성의 처지에서 첩을 들인다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첩으로 인해 위안을 얻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경제적인 부담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첩이 되는 여성은 상대 남성에 비하여 가계가 미약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능력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첩을 들이는 데에 있어서는 남자 쪽 부담이 상당히 클 수밖에 없다. 그나마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비인 경우는 수월한 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자식들의 신분 귀속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속량(贖良)227)보충대에 입속하여 양인화(良人化)하는 절차를 말한다. 절차를 밟아 양인으로 만들지 않으면 얼자녀들은 신분적인 제약으로 굴곡진 삶을 살아야 했으며, 자기 비첩 소생일 경우 혈육 간에 주종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다.

상대가 타인의 비일 경우에는 문제가 좀 더 복잡해진다. 이때에는 속신(贖身)228)다른 사람의 비를 사와 자신의 소유로 하는 절차를 말한다.과 속량이 모두 필요하였다. 즉, 타인으로부터 소유권을 넘겨받은 다음 이를 다시 양인화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러나 비의 주인은 임신한 비를 팔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팔 경우에는 많은 비용을 요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희춘의 조카 오언상(吳彦祥)은 다른 사람의 비인 말대(末臺)를 겁간하여 첩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주인이 말대의 몸값으로 비 네 구를 요구하는 바람에 다시 물릴 수밖에 없었다.

오희문의 『쇄미록(瑣尾錄)』에서도 이와 관련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오희문의 아들 윤겸(允謙, 1559∼1636)은 여러 차례에 걸쳐 축첩하였다. 한번은 다른 사람의 비인 진옥(眞玉)과 관계하여 축첩하려 하였으나, 주인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 결국 기첩(棄妾)할 수밖에 없었다. 떠나가는 진옥을 보며 오희문은 “잉태한 자식이 만약에 죽지 않으면 어찌한단 말인가.”라고 걱정하고 있다. 태어나 근심거리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세월이 흐른 뒤 오희문은 진옥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다. 어린 손녀가 보고 싶다는 생각에 연락을 하자 진옥은 어린 딸과 함께 오희문을 찾아온다. 진옥은 딸아이의 이름과 출생일을 오희문에게 알려 주며 하염없이 운다. 어린 손녀가 말을 하고 걷는 것이 사랑스러웠지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희문은 진옥이 개부(改夫)했는지를 알고 싶었으나 이는 차마 묻지 못하고 헤어진다.229)『쇄미록』 1599년 5월 9일.

첩을 삼은 이후에도 상당한 비용이 필요하였다. 이제 첩과 그 자식들은 거두어야 할 식솔이다. 유희춘은 첩가의 생계 대책을 위해 상당히 노력한다. 필요한 물품을 보내 주는가 하면, 노비를 지급하기도 하고, 자신이 배정받은 반인(伴人)230)조선시대 종친·공신·당상관들에게 그 특권을 보장하고 신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지급한 호위병을 말한다.을 첩가에서 사역하도록 하였다. 첩 무자(戊子)도 남편의 영향력을 동원하여 상당한 부를 쌓았으며, 지방관의 도움을 얻어 20여 칸이 넘는 집을 짓기도 하였다.231)이성임, 앞의 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한 양반이 “나는 밥을 먹이지 않아도 되고 옷을 해 주지 않아도 되는 아름다운 첩을 얻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한 기록이 보인다.232)유몽인, 『어우야담(於于野談)』, 『시화총림(詩話叢林)』 하, 통문관, 1993. 이는 아름다운 첩을 얻는 것이 좋지만 결국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첩을 취할 때도 일정한 의례가 있었을까? 중국의 『백호통의(白虎通義)』에는 첩을 얻을 때는 예를 갖추지 않는다고 하였다. 첩은 아무리 현능하다고 하여도 적처가 될 수 없으므로 시집보낼 때 다른 사람을 청할 수 없다는 것이다.233)반고, 신정근 옮김, 앞의 책, 395∼397쪽. 그러나 상대가 어떠한 여성이며, 그녀가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에 따라 약식의 의례를 치르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관기나 비를 들일 때는 정해진 의례나 절차가 없었다. 첩을 들이는 일은 부인을 맞이하는 것과 달라서 가문이나 집안에서 결정하기보다는 보통 남편이 혼자서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축첩은 남편이 가족이나 가문의 동의 없이 행하는 일종의 야합이다.

양반가 얼녀의 축첩 과정에는 일정한 의례가 있었다. 이러한 경우 이들이 일정한 반열에 속한 여성이므로 간략하게나마 의례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희춘의 네 명의 얼녀도 모두 예를 갖추어 출가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혼례 과정은 적자녀와 차이가 많았다. 유희춘은 얼녀에게도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는 딸들의 혼인에 깊이 관여하여 혼처를 물색하고 혼수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혼례 자체를 주관하지는 못했다. 혼례는 딸들의 어미인 첩이 주관하였고, 유희춘은 첩의 편지로 결과만을 확인하였다.234)구완회, 앞의 글. 그러나 적자녀의 경우는 달랐다. 유희춘은 손자 광선(光先)의 혼인 과정에 주혼자로 나섰다. 아들이 생존해 있는데도 손자의 혼례를 적극적으로 주선한 것이다. 얼녀의 혼인에 신분이 다른 아버지가 주혼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적서 간의 또 다른 차별이며 구별이었던 것이다.

1777년에 황윤석도 소실을 들일 때 일정한 의례를 갖추었다. 그러나 의례 자체는 매우 간단하여 양반가에서 통상적으로 행해지는 혼례 절차와 차이가 많았다.235)황윤석, 「담양기행」, 『이재난고』 권2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 즉, 이들의 혼례는 야합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거치는 간단한 통과 의례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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