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3장 정비된 혼인, 일탈된 성
  • 3. 불안정한 사랑 그리고 성
  • 막강한 본처, 불안한 첩살이
  • 처첩의 차이
이성임

처와 첩의 지위는 법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차이가 많았다. 처는 가문의 후사를 잇기 위해 동일한 계층에서 선택된 여성이지만, 첩은 남편의 개 인적인 취향에 따라 취해진 여성이다. 따라서 이들의 사회적 공인도와 혼인의 지속성에 차이가 많았다. 송나라에서는 첩의 지위를 본처와 하녀의 중간 정도로 보았다. 조선에서도 첩의 위치는 송나라와 유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일부일처제 사회로 의례를 거친 본처의 권한은 막강하였다. 처를 고르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비록 법 조항으로 규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양반의 강한 계급의식은 낮은 집단과의 혼인을 배제하였는데, 이러한 신분내혼은 혼인의 중요한 조건이었다. 따라서 정혼 상대는 동일한 계층의 처녀여야만 했다. 이러한 조건을 맞추기 위해서는 배우자를 지역적으로 멀리서 구할 수밖에 없었다. 상층민의 통혼권은 상당히 넓은 반면 하층민은 인접 지역에서 구해 혼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처첩의 위치는 어떠한 경우라도 바뀔 수 없었으며, 남편은 본처가 죽은 후에나 재혼할 수 있었다. 중혼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첩이 있더라도 첩이 본처가 될 수는 없었다. 의례를 갖춘 아내는 죽은 후에도 소홀하게 대접받지 않았다. 비록 그녀가 젊어서 죽었고 남편이 재혼했다 하더라도 그녀의 신주는 자손들이 모셨고, 복상(服喪) 기간이 끝나면 그녀의 신주는 남편의 사당에 봉안되어 정기적으로 제사를 받게 된다.

첩은 남편이 성적인 대상으로 삼기 위해 선택한 여성으로 신분내혼 규정이 적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의 출계 집단은 상당히 미약하여 가족의 일원으로 온전하게 인정받을 수 없었다. 첩과 남편의 관계는 살아 있는 동안에 한정되어 영속성이 없었다. 남편의 조상에 대한 의례적 의무가 없다는 데서도 첩의 불안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첩은 정기적인 제사로 기억되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신주는 선대의 조상과 함께 사당에 배향할 수 없었다.

남편과 본처 그리고 그들 사이에 출생한 적자녀의 지위는 안정적으로 보장되었다. 첩이 본처의 권위를 무시하고 도전하는 것은 양반 남성으로서 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부인 송씨가 유희춘에게 첩 무자(戊子)가 성질을 잘 내고 불손하다는 편지를 보내자 유희춘은 전후 사정을 살피지도 않은 채 첩에게 잘못을 돌렸다. 처첩의 처지가 정해져 있거늘 첩이 처를 능멸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군신(君臣)·처첩(妻妾)·적서(嫡庶)의 질서는 누구라도 훼손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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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은 철저하게 본처의 권위를 인정하고 따라야 하며, 남편도 본처의 지위를 보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즉, 본처를 중심으로 가족 질서가 유지되기를 원하였다. 본처도 이를 위해 상당히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희춘의 부인 송덕봉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송씨는 첩을 시켜 남편의 옷을 지어 보내도록 하는가 하면 얼녀들을 자상하게 보살핌으로써 본처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려 하였다. 얼녀들도 적모 송씨의 자상한 배려에 감동하였다. 둘째 얼녀 해복(海福)이 부인의 생일에 많은 음식을 준비하여 보내자 유희춘은 “부인이 얼녀들을 다독이고 어루만져 친자식처럼 사랑했기에 해복 등이 감격한 것이다.”라고 했다.

첩은 가족의 일원이지만 가족 질서를 어지럽힐 수 있는 위험한 존재이기도 했다. 따라서 남편과 본처는 첩이 자신의 입지를 넘보지 못하도록 철저한 위계를 만들었다. 박윤원(朴胤源)은 「계측실문(戒側室文)」236)『근재집(近齋集)』 권23, 「계측실문(戒側室文)」.에서 처와 첩, 남편과 첩, 적자녀와 첩의 관계를 자세히 밝혀 놓았다. 첩은 예를 갖추지 못한 천한 상대이니 정실의 자리를 넘보아서는 안 되며, 남편을 군(君)이라 하여 신하가 임금을 섬기듯이 해야 하며, 적장자와 적장자 부인의 명령을 쫓으라는 것이었다. 첩은 가족 구조의 최말단에 위치한다.237)정지영, 「조선 후기 첩과 가족 질서-가부장제와 여성의 위계-」, 『사회와 역사』 61, 2004.

첩은 본처 이외의 또 다른 성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첩은 남성의 성적인 대상을 한정시킴으로서 그들의 성생활을 안정시켜 주었다. 첩은 남성의 다양한 여성 편력과 이에 따른 질병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였다. 양인 이하 여성은 동일한 계층의 남성과 혼인하기보다는 양반의 첩이 되기를 선호한다. 이것이 평생 하층민으로 천대받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양반의 첩이 되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좀 더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양반의 첩이 되는 것은 일종의 신분 상승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이들 가운데는 첩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었다.238)이성임, 「조선 중기 양반의 성 관념과 그 표출 양상」, 『조선시대 사회의 모습』, 집문당, 2003.

그러나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첩의 사회적 위치가 어느 정도 보장된 것은 사실이다. 이들이 호적에 호(戶) 구성원으로 처와 함께 등재된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 처와 첩을 구분하여 차별하였지만, 첩의 존재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근대 가족’을 법제적으로 규정하려 한 민적법(民籍法) 단계에서도 여전히 첩이 남편의 호에 등재되었다. ‘축첩’은 전근대적인 행위이므로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윤리가 호적에 반영되는 것은 그 후의 일이다. 근대 이후에 첩이라고 하는 비정상적인 혼인 관계는 완전히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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