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3장 정비된 혼인, 일탈된 성
  • 3. 불안정한 사랑 그리고 성
  • 막강한 본처, 불안한 첩살이
  • 처와 첩의 갈등
이성임

우리 속담에 ‘시앗 싸움에 돌부처도 돌아앉는다’고 했다. 이는 축첩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남편의 다른 여자와는 진정으로 화해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김호연재(金浩然齋, 1681∼1722)는 지아비의 축첩 행위를 패독이라 하고 첩은 결코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적국(敵國)이라 규정하였다.239)박무영, 「남편의 ‘잉첩(媵妾)’과 아내의 ‘적국(敵國)’」, 『문헌과 해석』 18, 2002. 결코 원하지 않는 사람이 남편 때문에 가족 질서에 편입되었으니, 여기에서 생기는 가족 간의 갈등은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본처와 가족은 첩을 가족 구조의 최하층에 두고 가능하면 가정사에서 배제하려 하였다.

유희춘의 아들 경렴(景濂)의 작첩 과정에서도 상당한 갈등 관계가 형성되었다. 경렴은 복수(福壽)를 마음에 두고 여러 차례 겁탈한 뒤에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작첩 사실을 허락받고자 한다. 그동안 경렴은 아버지에게 절대로 첩은 들이지 않겠다고 장담한 상황이었기에 첩을 들이는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즉, 부인인 김씨(金仁厚의 딸)가 정신이 흐리고 서툰 것이 늙어가면서 더하여 의복을 전혀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작첩을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유희춘의 손자 광연(光延)은 겨우 여덟 살인데도 자기 아버지가 축첩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어머니의 살아갈 방도가 걱정이 되어 “내가 급제하지 못하면 우리 어머니를 구할 방도가 없다.”며 산사로 올라가 승려에게 독서를 하게 해 달라고 청하는 데에서 이러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240)『미암일기』 1573년 7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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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성주에서는 사위가 비와 간통하자 장모가 비를 살해하여 강에 빠뜨린 사건이 일어났다.241)『묵재일기』 1562년 3월 15일. 장모로서는 딸의 정적인 비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고, 때문에 딸이 불행해질까 염려하여 당사자인 비를 살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유희춘의 부인 송씨는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고 한시(漢詩)에 뛰어났던 여사(女士)였다. 그러나 그녀도 여느 부인들과 마찬가지로 남편이 혹시 외정을 두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결국 시어머니 3년상을 치르고 나서 송 씨 혼자서 남편이 귀양살이하는 곳을 찾아가는데, 그녀가 마천령 위에서 지은 시는 유교적 덕목을 실현하려는 부인의 강한 의지를 보여 준다. 송씨는 자신이 남편의 유배지를 찾아가는 이유를 ‘삼종(三從)의 도리 무겁고 자신의 한 몸은 가볍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원래의 의도는 유희춘과 첩 무자를 갈라놓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유희춘은 15세 연하의 비를 작첩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부인이 종성에 도착하기 전에 첩과 얼녀들은 해남으로 그들의 거처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남편에 대한 감시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유희춘이 귀향하기로 하고 내려오지 않자 혹시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여 화를 내기도 하였다. 유희춘이 전라 감사로 부임하자 송씨는 남편이 여러 관기를 접할까 염려스러웠다. 송씨는 이후에 전개될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남편과 이별하는 자리에서 정욕을 억제할 것을 종용했다. 그것이 기운을 보존하는 데 좋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부임지에 도착하자 사정은 달라졌다. 순행하는 곳마다 방기가 제공되어 유희춘은 일반 군현의 지방관보다 더욱 많은 관기를 접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남편이 옥경아를 아낀다는 소식을 접한 송씨는 상당한 심적 갈등을 겪는다. 그녀는 남편에게 중국 춘추시대 초장왕(楚莊王)과 월녀(越女)의 고사를 들어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오라는 뜻을 전한다. 즉, 남편에게 편지를 넣어 “월녀가 한 번 웃음에 3년을 머물렀다는데, 당신이 사직하고 오기가 어찌 쉽겠소.”라며 비아냥거렸다. 이는 춘추시대 초장왕의 고사를 읊은 유생(劉生)의 시구절로 유희춘은 초장왕에, 옥경아는 월녀에 비유한 것이다. 이에 유희춘은 “월녀의 한 번 웃음에 3년을 머물렀다는 창려(昌黎)가 방심한 유(劉)를 희롱하였지만 평생 정주(程朱)의 문에 들기를 원하는 사람이 어찌 동문 쪽으로 잘못 향할 리가 있는가.”라며 염려 말라는 뜻을 전했다.242)이성임, 「16세기 양반 관료의 외정-유희춘의 『미암일기』를 중심으로-」, 『고문서연구』 23, 2003.

이문건의 부인 김씨는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비의 색에 탐욕스런 마음을 품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이는 결국 남편의 축첩을 제한 하고자 한 것이다. 성주에 유배 중인 이문건은 연회나 유람에서 기생들과 어울려 음주가무를 즐겼다. 이문건이 해인사를 유람할 때 방기가 제공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인 김씨는 화가 극에 달해 가져갔던 잠자리를 칼로 찢어 불에 태우고 폭언을 퍼부어 댔다.

부인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한 것은 이문건과 성주 기생 종대(終代)의 관계였다. 종대는 각종 연회에서 이문건의 술시중을 전담하였고, 이문건과의 관계를 과시하고 다녔다. 이에 김씨는 이문건에게 종대를 가까이하지 말라고 여러 차례 당부하고 행수 기생(行首妓生)243)기생의 우두머리를 말한다.을 불러 종대에게 이러한 사실을 통보하라고 일렀다. 그러고는 밥도 먹지 않고 드러누워 병을 얻기에 이른다. 이에 이문건은 할 수 없이 행수 기생을 불러 이러한 상황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는 성주 인근에 회자되어 이문건은 한동안 심사가 편치 않았고 연회에 참석하기도 어려웠다. 부인 김씨는 포악한 행동과 언사로 남편의 어떠한 외정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인지 이문건은 평생 동안 그 흔한 첩실 하나 들이지 않았다.

유희춘이나 이문건 부인의 행동은 순종과 부덕을 미덕으로 여기던 전형적인 여인상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이들은 양반가의 부녀자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여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교육받았을 것이나, 이것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는 우리 일상에서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일상적인 모습이다. 어찌 보면 이들의 행동은 남편의 외정을 제한하기 위한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라고 하겠다. 양반 부녀의 질투 역시 사회적 규제만으로 해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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