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4장 결혼에 비친 근대
  • 2. 자유연애·자유결혼, 그 이상과 현실
  • 엘렌 케이와 콜론타이의 자유연애론을 싹 틔우다
신영숙

서구 근대의 바람이 불어오면서 자유연애·자유결혼 사상이 일제강점기 조선에도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특히 1920∼1930년대 초 신여성들은 자유연애·자유결혼론을 봉건적 남녀 관계와 가족 제도의 폐습을 타파하기 위한 여성 해방의 큰 방도로 생각하고 적극 수용하였다. 당시 미국·일본·중국 등지에 유학하고 돌아온 신여성들은 선진 여성 해방론의 자유연애와 결혼, 그리고 이혼에 대한 주장을 적극 지지, 소개함으로써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른 좀 더 평등한 부부 관계로의 지향은 여성 해방의 확실한 지표가 되었고 당시 급변하는 사회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1920년대 자유주의적 연애, 결혼 사상은 스웨덴의 엘렌 케이(Ellen Key)에게서, 그리고 사회주의적 자유연애 사상은 러시아의 콜론타이(Kollontai)의 『붉은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즉, 엘렌 케이는 그의 저서 『연애와 결혼』에서 자유로운 연애에 따른 자유로운 결혼이 여성도 가족도 행복하게 만드는 기본이라고 천명하였다. 당시 그의 사상은 ‘생 명의 종교’, ‘생명의 신앙’이라고 불릴 만큼 순수한 인간 생명에 기초하여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은 사랑으로 맺어져야 하며, 만약 사랑이 사라지면 혼인은 당연히 깨어지는 것이므로 자유이혼도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한편 콜론타이의 ‘붉은 사랑’이라고 일컬어지는 사회주의적 자유연애론은, 남녀의 사랑은 동지애로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내포하고 있다. 단순히 개인의 사랑으로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한 것에서 자유주의 연애론과는 큰 차이가 있다. 장국현(張國鉉)은 “콜론타이즘에 대해 연애란 사사(私事)이다. 매력을 느낄 때에 서로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연애는 육체의 결합과는 다른 결합이다. 우리는 연애로 우리의 용기와 능력을 배가하여 사회의 진보에 공헌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콜론타이는 정당하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연애는 우리의 인간성을 높이고 우리가 신사회를 위하여 싸우는 투쟁을 더욱더 능률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250)장국현, 「신연애론」, 『신여성』 5권 3호, 1931년 3월, 10∼14쪽.

이 같은 자유연애·자유결혼을 위해서 신여성은 자유로운 남녀 교제를 역설하였다. 1921년 당시 『신여자』 주필이던 김원주(金元周)는 남녀가 자유롭게 교제하고 여성이 남성과 접촉을 많이 할수록 사회를 빨리 알게 되고, 그럴 때만이 잘못된 혼인의 폐해를 고칠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서양에서는 교회에서 알기도 하고 무도장에 부모가 자녀를 데리고도 가며, 가정과 가정 사이에 초대도 있고 …… 남녀 교제가 없는 조선에서는 아마 서로 아는 집끼리 자주 왕래하는 것이 좋은 방법인 줄 압니다. ……이외에 교제가 넓은 이가 책임을 가지고 청년 남녀를 위하여 교제하는 회를 조직한다든지…….”251)김원주, 「신년 벽두에 조선 여자에 대한 여(余)의 소망」, 『매일신보』 1921년 1월 9일자 및 10일자.라고 하면서 건전한 남녀 교제가 행복한 결혼과 가족의 전제임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김명순은 자유로운 남녀 교제의 위험성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연애의 낭만이 실제와 다름을 암시하고 자유연애와 현실 간의 괴리를 경고한 것이다. “재미있는 연애 소설을 읽으면 반드시 그 책에 나오는 인물 중 에서 자기도 만들고 애인도 만드는데, 끝없는 공상에 취하여 앉아 있는 처녀들의 가슴은 이미 어지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니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올시다.”252)김명순, 「최근의 악풍조(惡風潮)」, 『매일신문』 1924년 9월 28일자. 그는 당시 값싼 염문(艶文)을 탐독하는 철없는 소녀들에게 철저한 감독과 지도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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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엽 김원주 캐리커처
일엽 김원주 캐리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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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김원주는 자유연애를 지지하여, 특히 봉건적 가부장제 아래의 여성 정절 이데올로기에 대해 공격하였다. 그의 ‘신정조론’은 여성에게만 정절을 강요하는 차별적인 성윤리에 대한 대 남성 투쟁의 차원을 넘어서 “재래의 모든 제도와 전통과 관념에서 멀리 떠나 생명에 대한 청신(淸新)한 의미를 환기하고자 하는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인격과 개성을 무시하는 재래의 성도덕에 대하여 열렬히 반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조는 결코 도덕도 아니오, 단지 사랑을 백열화(白熱化)시키는 연애 의식과 같이 고정한 것이 아니라 유동하는 관념으로 항상 새로울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불륜으로 간주되던 남녀 관계조차 과감히 인정하려 하였다. 그녀의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은 사회의 이목이나 전통적인 윤리 의식을 철저히 부정한 오직 ‘나’를 위한 의지의 발로이며, 또 그 이론을 직접 실천했다는 점에서 사회 규범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일체 생명은 사랑에서 우러나와 서로 돌보아지고 유대되는 힘과 섹스로 생산되는 번식력이 없다면 현실인 육체적 생명은 자멸할 것이다. 사랑과 섹스로 살아가는 것이 생명이지만 삶이 있기 전의 생명을 주제로 삼아 사랑과 섹스를 잘 조리하는 데 따라 생명적 생활과 비생명적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사랑의 상징은 꽃이라고 생각한다. 꽃은 극히 착하 고 가장 부드럽다. 또한 너그럽다. 그리하여 꽃의 세계에서는 쏘는 벌이나 썩히는 쇠파리까지 웃으며 맞아들인다. 그보다 더 힘이 세고 너그럽고 아름다운 것은 사랑이다. 그러니 가장 감수성이 부하고 열정이 왕성한 사춘기 청년 남녀의 일을 누가 시비할 수 있을 것인가!”

이상과 같이 일엽의 적극적인 사랑 예찬과 육체적 정조론에 맞서는 정신적 신정조론은 당시 사회에 성혁명이라는 하나의 의제(議題)를 던져 주었다. 그러나 육체와 정신을 가르는 이 같은 이분법적 논의는 충분히 검증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다분히 시험 수준에 있었다. 이 같은 논리는 오히려 일반 사회에서 거친 반발과 저항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신여성에게는 운신의 폭을 좁게 하는 면도 있었다. 그때까지도 일반 사회의 완고한 의식과 거센 비판에 여성들은 커다란 좌절과 고통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타협과 안주의 방편으로 현모양처주의(賢母良妻主義)가 미화되고, 여성에게는 여전히 강요된 희생과 현실 도피적 태도를 갖게 하는 것으로 변모하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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