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4장 결혼에 비친 근대
  • 2. 자유연애·자유결혼, 그 이상과 현실
  • 이상적 혼인론과 혼인의 실상
  • 변화를 꿈꾸는 부부 관계
신영숙

박영효(朴泳孝)는 일찍이 그의 개화 상소문에서 “무릇 남녀가 그 질투하는 마음은 같은데 남자는 유처취첩(有妻娶妾)하면서, 혹 그 아내를 속박하고, 또는 그 처를 쫓아내며, 아내는 그렇다고 개가도 못하고 이혼도 못하니, 이것은 법에서 여자의 간음만을 금하고 남자의 난잡함은 금하지 아니하는 까닭이다. 또 남자는 상처(喪妻)하면 재취(再娶)할 수 있게 하고 여성은 상부(喪夫)하면 아직 합근치 않았더라도 재가할 수 없으니, 이는 가족 친류(親類)가 제재하는 까닭이다.”261)박영효, 「개화 상소」(1888), 『근대 한국 명논설집』, 『신동아』 1966년 1월호 부록, 22∼23쪽.라고 하여 전통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 의식을 지적한 바 있다.

확실히 전통 사회에서 여자는 남자의 반려(伴侶)가 아니라 노예처럼 쾌락 또는 노동의 연장에서 인식되는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법률과 관습은 여자에게 아무런 권리도 인격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봉건적 인식과 폐습을 깨고 1920년대의 신여성이 주도한 자유연애와 결혼, 그리고 좀 더 평등한 부부 관계로의 지향은 급변하는 사회 현실에서 상당한 괴리와 부작용도 없지 않았지만 여성 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틀림없다.262)신영숙, 「일제하 신여성의 연애 결혼 문제」, 『한국학보』 45집, 1986, 182∼217쪽 ; 신영숙, 「일제 시기 부부 관계와 여성 생활」, 여성한국사회연구회 편, 『한국 가족의 부부 관계』, 1992, 363∼400쪽.

“무릇 결혼이라는 것은 사랑의 맺음이다. 결혼의 의의를 생각하려 하면 먼저 사랑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사랑을 다시 말하면 정이라고 할 것이다. 정은 어찌하여 생기게 되었음을 먼저 해결하여야 할 것이니, 이를 우선 학리상으로 지적(知的)이라는 것과 육적(肉的)이라는 것으로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지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상적 결혼을 가리킴이며, 육적이라고 하는 것은 정욕적 결혼을 가리키는 것이니, 이상적 범위는 어떠한 것이며, 정욕적 행동은 어떠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263)『여자시론』 창간호, 1920년 1월, 32쪽.

한편 사회주의 여성들은 가정에서 여성이 노예 같은 생활을 하는 이유는 경제적 독립을 얻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남의 아내와 남의 며느리가 되어 가지고 한갓 그 집안 안의 부모와 그 남편 한 사람만을 지극히 정성으로 받들고 공경하는 것보다 오히려 사람으로서 우리의 개성을 살리고 우리의 인권을 차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눈앞에 급박한 큰 문제이다. ……우리가 남자에게 부림을 받는 노예가 되며, 노리개가 되며, 기계가 되며, 오직 그들의 마음 가는 대로 사역이 되는 것은 한갓 우리가 우리 손으로 우리의 힘으로 옷과 밥을 얻지 못하고 남자에게 붙어사는 기생충이 되어 날마다 먹고사는 물질의 공급을 오직 그 한 사람의 힘을 비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일상생활에 경제적 독립을 얻지 못하고 일체의 생활 조건을 오직 남의 수중에 맡기고 있는 까닭이다.”264)「여성 해방은 경제적 독립이 근본」, 『동아일보』 1924년 11월 3일자.

실제로 사회주의 여성 운동가 허정숙(許貞淑)은 콜론타이의 연애관을 받아들여 자신의 뜻에 맞는 네 남자와 동거하였다.265)서형실, 「일제 시기 신여성의 자유연애론」, 『역사비평』 25, 역사비평사, 1994, 121쪽. 그녀는 비교적 공사를 적절히 구분, 대응함으로써 사회적 비난을 무마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경제적인 문제에 따른 산아 제한까지 주장한266)정종명, 「여성 문제」, 『조선일보』 1930년 1월 1일자. 정종명(鄭鍾鳴)도 신철(辛鐵) 에게 “당신은 미장가의 청년이요, 나는 시집가서 어린아이까지 낳은 과부의 몸이다. 그러나 나의 정신상으로 보면 나도 아직 미혼 처녀이다. 왜 그러냐 하면 열여덟 살 때에 시집갔다면 부모의 강제를 못 이겨 간 것이니까.”라고 했다. 그는 이후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나는 사랑으로 사는 동시에 개성으로 살겠다. 당신이 우리 운동 선상에서 몸을 빼지 않는다면 일개 운동자로 만나기는 하겠지만 성적으로는 결코 허락할 수 없다.”고 자신의 분명한 견해를 밝혔다.267)「사랑과 성애」, 『시대일보』 1925년 6월 7일자∼10일자.

같은 시기 여성 노동자들의 결혼과 부부 관계는 어땠을까? 그들이 지식인층 신여성처럼 자유연애를 구가하기는 분명 어려웠을 것이다. 그보다는 노동 현장에서 성희롱과 성폭행의 압박과 고통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노동자로서 맞벌이를 할 경우 살림을 거의 책임지면서 이중삼중의 고통을 당했다. 그들이 낭만적인 연애와 결혼 생활을 꿈꾸기에는 현실과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예컨대 의주에 있는 전매국 연초 공장의 한 기혼 여공은 작업 중에 심장 마비로 죽고 마는데, 그는 27년 동안 직공으로 가족을 부양하였다. 15세에 시집 와서 연초 회사에 다니던 장남이 17세에 병사하고 남편도 병으로 일을 못하게 되자 자신이 공장에 다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268)정오성, 「27년간 근로하든 여직공 안아지의 애화」, 『신여성』 7권 6호, 1933년 6월, 123∼125쪽. 또 다른 여공은 여학교도 다녔지만 부친이 사업에 실패하고 화병으로 별세하자 어머니의 강권에 못 이겨 돈은 있으나 일자무식(一字無識)인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어머니가 별세한 뒤 남편이 방랑 생활로 가산을 탕진하자 제사(製絲) 공장에 취직하였다. 이처럼 이들 여공은 집안 형편으로 대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남편의 방탕이나 병사 등으로 생활 전선에 내몰렸고 그곳에서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 공장은 ×창제사 공장입니다. ……이곳 동무들은 나이로 말하면 열세 살부터인데, 혹은 시집갔다 이혼당하여 온 사람, 혹은 시집살이가 싫어 다니러 온 사람, 혹은 강제 결혼에 몸을 피하여 온 사람, 혹은 보통학교 졸업한 사람과 못한 사람 이런 케이스나 이 중에는 보통학교도 졸업 못한 사람이 제일 많으며, 둘째로 이혼당하여 온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또 한 가지 치가 떨리고 무서운 것은 요새 우리 공장에는 풍기 문란(風紀紊亂)으로 일관하여 있답니다. 작년 정월에 지점장과 ×순이와의 사이에 ×× 관계가 있은 후부터는 감독들은 제각기 얼굴이 어여쁜 동무들을 농락하려고 기숙사로부터 공장으로 들어가는 어두컴컴한 복도나 으슥한 창고 속으로 불러내다가 순진한 우리 동무들의 정조를 빼앗는 것을 내가 알기에도 몇 번인지 모른답니다.”269)송계월, 「공장 소식」, 『신여성』 5권 12호, 1931년 12월, 108∼110쪽.

이처럼 여성 노동자들은 대부분 보통 교육도 받지 못한 가난한 집안의 딸이나 이혼당한 여성으로,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 폐병을 비롯한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 죽어 갔다. 또한 사생활까지 침범당하는 기숙사 생활이나, 일본이나 조선 남자 감독들의 구타·성희롱·성폭행 등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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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공장 여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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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도시와 다른 향촌, 즉 농촌 지역의 결혼과 부부 관계는 어떠했을까? 도시에서 시작된 자유혼 풍조가 여기라고 비켜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농촌 사회의 특수성에 따라 자유혼에 대한 경계는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농촌에서의 이 같은 자유결혼론도 당연히 일부 농촌의 지식인층에 해당하는 것이며, 일반 농민의 혼인은 전통 사회와 대동소이함을 면치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현대의 풍조가 이 시골이라고 들어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경향은 무엇으로써 알 수 있는고 하니 결혼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갈등 비극으로써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 전날 밤에 혼인 당자의 반대로 파혼이 된다든지, 혹은 부모가 결정한 혼처에 불만을 품고 정혼한 후에 출가를 하는 등 결혼 전에 일어나는 갈등이 점점 많아지는 것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까지 결혼하는 당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경향이 보인다. ……부형이 자녀에게 결혼을 아희(兒戲)같이 한다는 비난과 자녀들은 부형에게 대하여 너무나 완고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도회의 세례를 받은 지식군들의 자유결혼이 비난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정조 관념이 박약하다는 것과 둘째는 연애결혼을 하는 정도의 남녀는 농촌의 노동에 감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대 인텔리가 근육 노동을 싫어하는 것은 큰 폐단 중의 하나일 것이다.”270)정래동, 「향촌의 결혼 문제 편감」, 『신가정』 1934년 8월호, 74∼77쪽 .

결국 농촌에서 자유결혼은 성과 노동 두 가지 측면에서 많은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만큼 새로운 의식과 현실이 조화를 이루기는 더 어려웠다.

“향촌에서는 아직도 부모가 자녀의 혼인의 주관자가 되어 있다. 현대 청년이라고 해도 가족을 전연 떨어져 살 수 없는 만큼, 또한 그네들의 의견을 참작하지 않을 수도 없는 터이다. 이곳에 현대 혼인의 갈등이 있으며, 곤란이 있다. 남자가 여자를 선택한 표준을 본다면 조행·미모·학식·재산 등을 중시하는데, 향촌의 인텔리 청년은 학식을 그리 중시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확실히 가정의 영구성을 생각함으로써 지식 있는 여자를 싫어하는 것이다. 남자와 서로 합의가 되지 않는 때에 이혼을 그리 어렵게 여기지 않으며, 또 보통 인텔리 여성은 결혼 후에 다른 남자와 연애하는 것을 그리 나쁜 도덕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보임으로 항시 가정이 파멸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서로 시인할 만한 혼인은 백에 하나를 벗어 나지 못하며, 그러한 여자의 조건을 맞추기 위하여 향촌에서도 점점 새 처녀를 재취 삼취(再娶三娶)에게 보내는 예가 많으나, 그 폐해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그 전 조혼(早婚)보다 더 심하다는 평이 있다. 소위 개량되었다는 혼인이 그 내용에 들어서는 이와 같이 남녀평등의 견지에서 불합리하며 기형적인지라 기타의 혼인이 모조리 기형적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은 더 말할 것 없다. 혼인 문제가 이와 같이 기형적으로 발전하여 가는 데에는 사회의 각 방면이 기형적인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271)정래동, 「혼인상으로 본 향촌 사회」, 『신가정』 1935년 4월호, 40∼45쪽.

이와 같은 언급은 신여성의 자유연애 의식은 농촌 생활에 어울리기 힘든 것으로, 결혼 생활의 파탄과 위기를 불러오기 쉽다고 지적하면서도 그 원인은 기본적으로 사회 구조상의 문제임을 분명히 하였다. 강원도 양구의 남성이나 서울 관철동의 남성조차도 자유혼은 아직 시기상조이며, 부모의 동의를 반드시 얻기를 강조하였다.272)「결혼에 대한 나의 의견」, 『신여성』 2권 5호, 1924년 5월, 57∼58쪽. “우리 조선에는 아직도 전제적(專制的) 결혼의 시기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결혼 자유도 얻지 못한 우리 처지에 이혼 자유가 용이할 수 있습니까? ……평북 지역에서는 돈을 주고 신부를 사야 하는데, 이런 나쁜 풍속을 깨지 않고는 장가갈 생각이 없습니다.”273)평북 희천 KDD, 「나의 장가 안 가는 이유」, 『신여성』 2권 5호, 1924년 5월, 43쪽. 이는 자유연애·자유결혼론이 새롭게 나온 것 이상으로 전제적 혼인과 조혼이라는 누습(陋習)이 여전함으로써 혼인난(婚姻難)이라는 새로운 사회 문제가 대두하고 있음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게다가 자유연애에 의한 결혼은 그 자체로 이미 이혼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나혜석(羅蕙錫)과 김일엽(金一葉) 같은 신여성의 예에서뿐만 아니라 향촌 지역에서의 자유혼에 대한 경계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남녀 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의 실마리를 보인다고는 해도 여전히 여성에게 불리한 이중적 잣대가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신여성이 아무리 신정조론 등을 부르짖으며, 여성 해방에 따른 남녀평등을 주장하여도 현실 사회에서 그들의 이상은 저만큼 멀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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