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4장 결혼에 비친 근대
  • 2. 자유연애·자유결혼, 그 이상과 현실
  • 혼인의 난맥상
  • 조혼·축첩·제2부인
신영숙

흔히 1세대 신여성으로 손꼽히는 서양화가 나혜석, 소설가 김원주와 김명순이 강제혼을 거부하고 자유연애를 통한 자유결혼·자유이혼을 실천한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그 이상으로 성악가 윤심덕을 비롯한 또 다른 신여성들은 이른바 유부남과의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따른 정사(情死), 동반 자살, 또는 도피행각을 벌이기도 하였다. 기혼남과 미혼 신여성 사이의 사랑과 결혼이 사기 결혼·이중 혼인·도피행각 등의 사회 문제로 비화되었고 결국은 여성의 좌절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남성 중심의 권력 관계 안에서 새로운 자유결혼이 부닥치게 마련인 과도기적 혼란상이라 할 수 있다. 당시에도 조혼의 폐해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은 것은 바로 이 같은 전통 혼인에서 근대적 결혼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혼인의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표 ‘1932년 남녀의 혼인 연령 비교’에서 알 수 있듯이 1930년대 전반기에 여성의 조혼은 여전하였고, 1932년의 조혼 비율이 전 해에 비해 두 배로 격증하였다는 지적은 그만큼 조혼이 성행하였음을 뜻한다. 즉, 조혼제는 갑오개혁 때에 이미 폐지되었지만 현실 사회에는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37년 이후 전시 동원 체제 아래에서 여성의 조혼은 강제 동원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더욱 조장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조혼의 원인과 폐단은 맞물려 계속되었다.

<표> 1932년 남녀의 혼인 연령 비교
성별
나이
남자 여자
총수(명) 백분율(%) 총수(명) 백분율(%)
15세 미만     12,575 9.9
17세 미만 18,470 14.4    
19세 이하 39,316 30.7 85,878 67.0
20∼24세 42,358 33.0 21,827 17.0
25∼29세 16,914 13.2 4,785 3.7
30세 이상 11,200 8.7 3,139 2.4
128,258 100 128,258 100
✽『신여성』 1933년 9월호, 56∼57쪽.

진남포 후포리에서 “시집살이에 재미를 못 붙이고 소박데기 살림을 하는 동안에 동리의 젊은 놈 하나를 정부로 삼았던 것이 동리 사람 눈에 들켜 서 겁결에 목을 맸든 것이었습니다. 15세 남자와 17세 여성이 혼인, 3년 후 뜰 가의 아카시아 나무에 목을 맸습니다. 다짐장(서약서)을 받고 용서했으나, 다시 양초를 먹고 죽네 사네 하였습니다. ……정부를 못 만나게 하여 살 재미가 없다는 것이 이유로 결국 이혼하여 쫓아냈습니다.”283)홍CS, 「두 번째나 무서운 일을 당했습니다」, 『신여성』 2권 5호, 1924년 5월, 42쪽. 하는 하소연이야말로 조혼 폐해의 단적인 예이다. 실제 조혼의 폐해는 “장성하기 전에 늙음을 재촉하고 어린애를 키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모두 불완전하다. 시부모에게 적합한 며느리는 되어도 남편에게 적합한 안해는 못됨으로 이혼이 발생하는 것이다.”284)이정로, 「조혼의 폐해」, 『가정잡지』 창간호, 1922년 5월, 18∼20쪽.라고 끊임없이 지적되었다. 심지어는 조혼한 신부가 시가 사람들에게 매를 몹시 맞고 정신 이상이 되었다는 소식과 17세 색시가 집안에서 강제로 혼인시키려고 하자 혼인 사흘 전에 철도에 뛰어들어 자살한 사건이 생기는 등 조혼에 따른 여성의 비극이 속출하였다.285)「축쇄 사회면」, 『신여성』 8권 1호, 1934년 1월, 11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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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20∼1930년대에 혼인의 혼란은 축첩으로 확대되어 갔다. 귀족 부호 외에 교원·학생·관리 들이 첩을 두었다. 첩과 제2부인은 본질이 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구제도인 첩제(妾制)에서의 첩을 변형하여 제2부인이란 어쭙잖은 이름으로 다르게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연애지상주의가 이용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실리를 추구하는 신여성 첩 또는 조혼의 폐해 속에 제2부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286)「고난 속을 가는 여성 좌담회, 가정 생활을 중심으로」, 『여성』 4권 10호, 1939년 10월, 20∼29쪽 .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조혼·강제혼 등 봉건적 혼인 제도가 여전히 남아 있는데다가 쾌락과 향락을 추구하게 만드는 퇴폐적 사회 분위기는 축첩, 즉 제2부인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배운 신여성조차 이 같은 경향에 편승하여 자신의 안일을 추구하기만 하였다. 따라서 당시에 여학교를 졸업한 신여성이 첩이 되는 이유로는 속아서, 유혹에 빠져서, 자유연애에 중독되어 스스로 타락, 안일과 사치를 취 하려는 부르주아적 근성이나 허영심·생활난에 쫓겨, 또는 일가를 위한 희생 등이 꼽혔다. 이는 남성 중심의 시각에서 첩이 되는 여성을 비판적으로 보는 면도 없지 않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적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여성이 어쩔 수 없이 채택하는 생존 전략이라는 점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개화기부터 거론되던 조혼과 축첩제의 폐단은 근대 사회로 가지 못한 일제강점기에 봉건적 잔재로 더욱 강화, 이용되었고 여성에게는 더 큰 질곡(桎梏)으로 작용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가난한 집에서 딸을 일찌감치 팔아먹듯 강제 결혼시키는가 하면, 신여성을 표방한 여성의 자유분방함이 경제적 빈곤에 맞물려 있을 때 여성은 축첩제에 쉽사리 편승하였던 것이다. 남성 중심의 축첩제가 여성에게 쉽게 경제적 부와 향락을 가져다주는 수단의 하나로 간주되곤 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여성이 스스로 첩이 되거나 첩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이 조장되어 간 것이다.

사회주의 작가 임화(林和)는 “남편 있는 여자라고, 아내 있는 남자라고 사랑해서 안 된다는 천리(天理)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나 자기가 어떠한 조건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사랑의 감정은 솔직히 거리낌 없이 발현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현재의 가정법은 가족에서 주권이 남자 쪽에 있기 때문에 남자의 안해된 사람의 비극은 그다지 고려하지 않습니다. 유부남과 여성 간의 사랑은 큰 죄가 안 됩니다. ……낡은 결혼 제도의 일 비극으로 이해합니다. 개인의 정애(情愛)는 사회의 일반 질서와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형성되려고 하는 질서의 전제가 낡은 질서와 대립하고 있는 것입니다.”287)임화, 「안해 있는 사람과의 사랑」, 『여성』 4권 4호, 1939년 4월, 22∼24쪽 .라고 혼인의 왜곡상이 시대의 대립임을 분명히 하였다. 결국 그에 따른 축첩, 즉 제2부인의 문제는 심각하였던 것이다.

“호색하는 관호가(官豪家) 또는 소위 명사 지사류의 인간들이 금력이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유녀나 인텔리 여성을 사드리고 꼬여드리는 것은 본격적 축첩이다. ……‘여학생첩’으로 인텔리 여성이 자원 진출하는 것은 더욱 가증스러운 천녀(賤女)이다. 지금 조선에 있어 해방된 인텔리 여성의 연애와 결혼의 대상인 청년들의 반 이상은 기혼자다. 인습의 제단에 올라갔던 희생자의 한 사람들이다. ……현실을 바라볼 때 우리는 웬만한 인텔리 여성이 민적(民籍) 없는 안해, 즉 제2부인임을 발견한다. 이러한 현실을 앞에 놓고 우리는 오로지 재래의 도덕이나 법률에만 구애받아 불가하다고 일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부부간의 파탄 문제 ……해결책이 있다면 이 과도기라는 시대가 지나간 뒤에 ‘시간’ 그것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 것이다.”288)전복희, 「특집 제2부인 문제 검토」, 『신여성』 7권 2호, 1933년 2월, 2∼5쪽.

이처럼 아무리 제2부인을 동정한다 해도 법률상 제2부인은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그 자식은 사생아(私生兒)가 되어 아버지 호적에 아들이란 명칭을 얻지 못하게 되고 사회적 천대와 모욕을 받게 된다. 결국 그 여성의 지위는 비참하였던 것이다.289)이인, 「법률상으로 본 제2부인의 사회적 지위」, 앞의 책, 6∼9쪽. 이에 대한 지식층 남녀의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남편에게 소박 받는 안해는 기실 불쌍한 무리일지언정 욕하고 꾸짖을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을 가장 잘 이해하고 지도해야 할 선각 여성으로서 그들의 자리를 빼앗아서 그들에게, 이성에게 받는 괴로움과 동성에게 받는 원통을 이중으로 준다는 것은 인도상으로 보아서도 그리 잘 된 일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연애 행동의 자중을 비는 터이며 직업적 생활적으로 이 과오를 감행하는 유녀층 여성의 미몽을 깨우치고 ……전통적 타성의 청산을 규호(叫號)치 않을 수 없습니다.”290)정인익, 「여성의 투철한 자각에 의하여」, 앞의 책, 10∼14쪽.

결국 축첩제는 가부장제 사회 제도상의 문제인데도 여성에게 개별적으로 잘 대처하기만을 강변하는 것이 당시의 문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 래도 ‘사회의 병폐로 생긴 기형적 존재’로 조혼과 기아 상태의 농촌 여성이 유곽에 팔려 가는 당시 상황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291)유광렬, 「동의 또는 동정한다-근본적 광정 전에 신도덕률 수립-」, 앞의 책, 14∼16쪽. 그리고 “러시아와 같은 성도덕제로서 연애결혼을 해서 살다가도 서로 싫으면 떠날 수 있는 사회 성도덕을 세웠으면 합니다. ……‘사랑이 없는 가정은 악이다.’ 하는 새로운 도덕을 세우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292)주요섭, 「제 난관을 초월하는 애정 문제」, 앞의 책, 16∼17쪽.라는 해결책도 나름대로 제시되었다. 동시에 ‘조혼제 등 사회 제도의 개혁’, ‘계급 해방이 여성 해방’ 등 여성 처지에서의 해결 방안도 나왔다.293)김자혜·김활란·박화성·모윤숙 등 여성의 제안이 나와 있다. 앞의 책, 18∼22쪽.

결론적으로 여전히 순결과 정조를 끊임없이 강요당하는 여성, 제2부인이 되는 신여성, 소박당하는 구여성 등 당시의 사회적 모순과 갈등 속에 여성 문제가 계속 나왔다. 그 가운데서도 제2부인의 존재는 당시 가부장제 사회의 유물이며, 근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사회 경제적으로 남자에게 빌붙어 살아가려는, 한마디로 총체적 가부장제의 산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서울이나 외국으로 유학한 기혼 남성이 그곳에서 신여성을 만나 사랑하게 되고, 고향의 구여성 부인을 버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그때 생기는 사회적 물의나 비판은 주로 여성에게 쏟아졌다는 현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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