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4장 결혼에 비친 근대
  • 2. 자유연애·자유결혼, 그 이상과 현실
  • 혼인의 난맥상
  • 사회에 기여한 독신·만혼 여성·과부
신영숙

한편 당시 왕성하게 사회 활동을 한 신여성 가운데는 독신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김활란·이숙종·고황경·서은숙·윤성덕 등을 들 수 있다. 윤심덕의 동생인 성덕은 언니들의 지원으로 미국 유학 후 이화여전 피아노과 교수가 되어 일찍 과부가 된 맏이 심성과 조카 딸 한 명과 함께 살았다. “혼자 사는 것이 싫증이 난다든지 괴로움을 느낀다든지 하면 벌써 결혼했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사는 것이 편하다오. 근심 걱정도 없고 또 자유롭고…… 애써서 결혼할 까닭은 없지 않소.”306)「당대 여인 생활 탐방기」, 『신여성』 7권 7호, 1933년 7월, 58∼62쪽.

이숙종은 1937년 당시 성신여학교 교장으로 조카와 식모와 함께 살았 다. 그의 생활에 큰 비중을 차지하던 절친한 친구가 죽고는 살아갈수록 결국은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러나 취미 생활로 화초를 기른다든가 비 오는 날 골동품 가게를 돌아보고 차를 마시는 일 등을 하였다. 교직 생활 14년차의 이화보육학교 학감인 서은숙도 막내 동생도 결혼했으나 독신인 채 부모와 같이 살며, 편지·글 쓰는 일과 동요·동화·민요 등을 스크랩하는 취미 생활뿐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피아노에 맞춰 노래하는 것을 즐겼다.307)「여류 독신 생활 타진기」, 『여성』 2권 10호, 1937년 10월, 20∼23쪽.

당시 독신 여성은 여성이 가정과 직장을 병행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세상임을 일찌감치 간파하고308)김활란, 「직업 전선과 조선 여성」, 『신동아』 1932년 9월, 142∼144쪽. 의도적으로 독신을 고수하든가, 아니면 사회 활동을 하다 그 생활에 익숙하여 굳이 혼인의 의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이들은 서로 돈독한 자매애로 잘 어울렸으나 때로는 30세가 넘어 늦게 결혼하는 예도 없지 않았다. 만혼한 예는 황신덕·황에스터 자매가 대표적이다.

이들에 대해 당시 사회는 상도(常道)를 벗어난 기형적인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려운 생활을 극복하면서 자신의 사업이나 예술을 위해 비범하게 생활하는 데 큰 관심과 호의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교육 재단을 설립하여 후학 양성에 힘쓰거나 사회 운동에 투신한 조신성·차미리사309)「여류 사업가 열전, 의지의 사도 차미리사 씨」, 『여성』 3권 7호, 1938년 7월, 64∼67쪽.·최송설당·백선행 등 많은 여성이 있다. 사회적 비판을 무릅쓰고 이혼한 박인덕은 그 후 농촌 사업을 하고 아버지와 살면서 여고생 딸을 가끔 만나러 가는 당당함을 보이기도 하였다.310)「당대 여인 생활 탐방기」, 『신여성』 7권 7호, 1933년 7월, 62∼65쪽. 최근 여성들의 만혼이나 독신 취향을 이때와 비교해 보는 것도 문화사적으로 하나의 의미를 가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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