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4장 결혼에 비친 근대
  • 3. 강제 결혼이 빚어낸 여성 범죄
  • 탈출구로 모색된 도망과 방화 행위
신영숙

결혼의 참혹함을 참지 못하여 도망한 여성의 경우는 앞에서 살펴보았던 신여성의 자유연애에 의한 도망과는 크게 다르다. 근대식 교육을 받고 나름대로 배운 신여성은 좀 더 주체적인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사랑을 추구하고 합리화하며 도망을 쳤다고 한다면, 무지한 빈곤층 여성은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극복하기 위해 도망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법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다만 그들이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는 점에서, 그 고통의 정도는 훨씬 컸을 것이며, 동시에 어느 정도 당시의 자유연애·자유결혼의 바람을 그들도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어서 그런 행동이 가능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도 전통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의 변화를 일정하게 감지하고 자신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나 욕구는 분명히 갖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부모에 의한 강제 결혼에 반발한 어린 여성들이 결혼을 앞두고 도망을 간 사례는 자유연애에 빠져 도망친 사례 못지않게 흔하게 일어났다. 그들은 공부를 하기 위해 도회지로 나가기도 하고,318)「인습 결혼에 반대코 유랑하는 단발 여성」, 『조선중앙일보』 1933년 9월 20일자. 여공 생활을 하던 여성도 시골 사람하고 농사나 지으면서는 못 살겠다고 퇴혼(退婚)의 편지를 여러 차례 남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319)「이팔 소부가 결혼식 거절」, 『조선중앙일보』 1933년 11월 20일자. 심지어는 예식 날을 8일 앞두고 집을 나간 후 소식이 없는 신부 집에 남자측에서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예도 나왔다.320)「결혼일 앞두고 출분한 여자」, 『조선중앙일보』 1933년 11월 20일자. 그런가 하면 결혼 당일 도망친 신부가 며칠 후 부모에게 발각되어 2차 결혼 준비에 바쁘다는 기사도 하루를 두고 등장할 정도였다.321)「인형의 집엔 가기가 싫어!」, 『조선중앙일보』 1933년 11월 21일자. 이처럼 부모의 강제혼에 거세게 반발하여 도망가거나 아니면 도망 못한 신부가 결혼 후 결국은 도망을 치든지, 아니면 방화로 자신의 생활을 개선하려는 과감한 시도를 하였던 것이다.

열 살이나 많은 남자와 결혼한 16세의 여성은 시집에 불을 놓으면 친정으로 쫓아 보낼 것이라는 생각에 수십 번이나 시집에 불을 놓아 징역 3년의 실형을 받기도 하였다.322)「조혼 여폐(餘弊)의 활증거(活證據)」, 『동아일보』 1921년 12월 27일자. 여성의 시집 방화는 나이 많은 남편에 대한 공포에서 일부러 쫓겨날 구실을 만들기 위해 하거나,323)「남편 무서워 시가에 방화」, 『동아일보』 1928년 5월 31일자. 남편이 작첩 후 자신을 괄시하거나, 시부모의 학대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도 하였다.324)「남편 작첩에 분개」, 『동아일보』 1931년 1월 16일.

이상과 같이 가난한 농촌의 배우지 못한 어린 여성들이 자신에게 닥친 결혼의 강요, 그리고 잘못된 결혼 생활에 대해 도망으로 또는 방화로 저항한 것이 당시 사회에서는 특기할 기사로 입에 오르내렸고, 여성 범죄로 대서특필되었다. 그들 여성은 식민지 가부장제의 희생양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름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몸부림쳤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단지 안타까운 것은 사회가 그들을 용납하지 않음에 극단적인 범죄로 이어진 것이고, 여성은 죄인이 되어 자신의 소망과는 달리 사회적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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