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4장 결혼에 비친 근대
  • 3. 강제 결혼이 빚어낸 여성 범죄
  • 식민지 가부장제와 여성 범죄의 상관성
신영숙

앞의 여성 범죄 중 가장 심각한 사회 문제로 제기된 것은 간부간부(姦夫姦婦)가 공모하거나 단독으로 본부(本夫)를 살해하는 경우였다. 살해 방법으로는 독살이 가장 많았고 흉기 또는 교살에 의한 것도 있었다. 1925년부터 1929년까지 본부 살해가 69건에 90명이나 연루되었다.325)이종민, 앞의 글, 7쪽. 참고로 또 다른 통계를 보면 1911년부터 1915년까지 본부 살해죄로 처형된 여성이 전국에 128명으로 매년 25건이 넘었다. 류승현, 앞의 글, 375쪽. 1929년의 살인범 중 여성이 106명이고 그중 본부 살해범이 63%나 되었다.

같은 시기 다른 나라의 범죄 통계와 비교해 보면 여성이 살인죄를 저지르는 경우는 남성의 10% 이내에 지나지 않는데, 조선의 경우 놀랍게도 88%를 차지하였다. 살인죄를 지은 여성 중 남편 또는 남편의 부모 살해에 관련된 여성을 제외한 나머지는 약 10%이었다.326)이종민, 앞의 글, 8쪽.

이는 그만큼 여성의 본부나 시부모 살해가 많았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결국 잘못된 혼인 제도에서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다.

한편 범죄 연령을 보면 본부 살해 여성의 81.3%가 16세 이전에 결혼하 였고, 피살된 본부의 결혼 연령은 15세 이하가 22%였다고 한다.327)류승현, 앞의 글, 376쪽. 또한 그들 부부간의 연령 차이도 여성이 10년 이상 어린 경우가 많았는데, 극단적으로는 8∼9세의 여성이 18∼22세, 또는 13세, 29세의 남편을 맞은 경우도 있었다.328)이종민, 앞의 글, 16쪽.

그런데 왜 부부 중 여성이 남편 또는 시부모를 살해하는 것이 이토록 자행되었는가? 1919년과 1923년에 살인이나 방화를 저지른 18세 미만 범죄자 중 남자는 없고 여자는 각각 여덟 명·열 명이었고, 1926년에는 남자 한 명, 여자 14명이었다. 이 통계는 곧 당시 18세 미만의 살인, 방화 범죄자 가운데 여성이 많았음을 잘 알려 준다. 이는 또한 잘못된 결혼 제도의 피해자 여성에게 그 같은 극단적인 방법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1925년 『동아일보』는 당시 여성의 살인과 방화의 원인을 네 가지로 분석하여 제시하였다. 첫째 조혼, 둘째 사랑이 없는 내외, 셋째 첩 제도, 넷째 시어머니라고 하였다.329)「여자 살인범과 방화범이 남자의 삼분지이」, 『동아일보』 1925년 12월 3∼5일자. 이는 모두 부모에 의한 강제 결혼이 빚은 결과라 하겠다.

동시에 당시 일제 식민지 관료나 전문가들도 조선 특유의 범죄를 야기하는 제도적 배경으로 당연히 조혼제를 지목,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 안에는 조선 사회의 전근대성이 전제되었고, 여성은 또다시 생물학적 열등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비합리적인 괴기(怪奇)한 존재임이 부각되고 있었다. 즉, 남편 살해 여성은 일정하게 잘못된 결혼 제도의 희생양이면서도 극단적인 살인 동기 뒤에 숨어 있는 성추문 등이 과장되어, 탈선한 독부(毒婦)의 이미지를 양산해냈던 것이다.330)이종민, 앞의 글, 18쪽. 결국 일제강점기 식민지 지배는 종래의 전통적 가부장제를 온존, 강화시켜 여성을 이중 삼중으로 억압하고 핍박한 것이다.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은 가부장적 편견과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식민지 인식에 의해 완전 매장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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