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4장 결혼에 비친 근대
  • 4. 사진결혼을 한 사진 신부들
  • 조선인의 미국 이주와 사진결혼
신영숙

조선인의 본격적인 미국 이민은 1903년에서 1905년 사이에 65척의 선박을 타고 7,226명이 하와이 호놀룰루로 건너간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 가운데 여성은 637명이었다. 갑신정변(1884) 실패 후 정치적 망명을 한 서재필·박영효·서광범 등을 비롯해 1899년 안창호, 1904년 이승만, 1905년 박용만 등이 도미함으로써 조선인의 미국 이주가 시작되었다.

조선인의 이민은 1901년 가뭄 때 농민 구제책의 하나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궁핍한 생활을 피하기 위한 이민은 당시 하와이에서도 적극 요청함으로써 계속되었다. 조선인 이민은 65% 이상이 문맹이었고 영어도 모르는 상황에서 10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과 매우 낮은 임금에, 백인 등 외국인 감독의 횡포 또한 극심하여 한마디로 노예 같은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이 같은 가혹한 노동 외에도 극장·학교·식당 등 공공 기관 곳곳에서 겪는 인종 차별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초기 이민의 한 유형인 사진결혼은 미주에 이민한 동양인들을 안정시키기 위한 일종의 혼인법에 의거한 것이다. 미국과 하와이에 있는 남자가 본국의 처녀에게 사진을 보내 선을 보인 후 사진을 보고 시집가겠다고 한 처녀를 데려다 결혼하는 이 방법은 중국인·일본인·조선인 이민 대부분에게 적용되었다. 타국에서의 독신 생활은 술과 노름, 아편 등에 빠지게 하여 사회 문제가 되었고, 그 해결 방안으로 혼인과 가족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동양인과 백인의 결혼은 서로 기피하였다. 결국 사진결혼을 이용, 고향에 편지와 사진을 보내 신부를 조달하는 방안이 나왔고, 사탕 재배 회사와 이민국도 적극 협조하였다. 그 결과 1910년부터 1924년 10월까지 하와이에 온 사진 신부가 951명, 미국 본토에 온 여성이 115명이었다. 이러한 아시아계 여성들의 사진결혼 입국은 1908년에 시작되어 1924년에 막을 내린다. 1924년 동양인 배척법이 공포된 후에는 유학생 외에 아시아의 모든 이민이 중단됨에 따라 사진결혼도 끝났다. 조선에서는 1910년 이후 사진 신부가 등장하는데, 그들은 물론 조선인 자격으로 미국에 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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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결혼 때 주고받은 신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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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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