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4장 결혼에 비친 근대
  • 4. 사진결혼을 한 사진 신부들
  • 안정된 삶을 일군 사진 신부들
신영숙

부푼 꿈을 안고 하와이나 미국 본토로 건너온 사진 신부들의 결혼 생활은 어떠했을까? 1910년 11월 하와이에 도착한 최초의 사진 신부는 최사라였다. 그녀는 하와이에서 1909년 2월 창립된 국민회(國民會) 총회장 이내수의 부인이었다. 이내수는 초기 조선인 사회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 인물이다. 1916년 김도연은 1904년 미국에 노동 이민으로 건너간 윤영호와 혼인하였다. 그녀는 여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간호학교에 다니 기 위해 사진 신부로 건너갔다. 1919년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의 창립 당시부터 50년이 넘게 그 단체에서 활동한 그녀는 1894년 강원도 김화의 기독교 집안에서 3남 4녀의 맏딸로 태어났다. 13세에 원산 루씨여학교에 다니던 중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귀향했다가, 다시 서울의 간호학교에 입학, 3년 동안 수학하던 중 친구들이 사진결혼하러 미국으로 가는 걸 보고 자신도 미국을 동경하게 되었다. 먼저 간 친구가 윤영호의 사진을 보내고 결혼을 권했을 때 그녀는 내심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와 학교 교장까지 자신의 사진 결혼에 반대하는 것을 무릅쓰고 끝내 허락을 받아냈다. 그녀는 상하이를 거쳐 일본에 억류되었다 강제 귀국당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22세에 14세 연상의 남편을 만나 이대위 목사 주례로 결혼한 후 벼농사, 식당 경영 등을 하다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그 뒤로도 이들 부부는 도시와 농장 생활을 전전하며 4남 1녀를 공부시켰다. 애초에 김도연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귀국해 강원도 무의촌 산골의 환자들에게 봉사하려던 자신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자녀와 가족을 위한 생활에 후회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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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결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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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살로메 역시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 17세 때 34세의 방사겸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1916년 2월 16일 사진 한 장을 들고 차이나호로 상하이를 떠나 일본, 하와이를 거쳐 한 달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사진 결혼이 무엇인지도 몰랐어요. 먼저 미국에 사는 노총각에게 사진이 한 장 왔지요. 보니까 처음부터 내 마음에 들어 나도 사진 한 장을 보냈지요. 간도에는 사진관이 없었어요. 130리나 되는 회령까지 나가서 사진을 찍어 보냈는데, 배편으로 오가는 데 두 달은 걸렸지요.” 하고 사진 결혼 과정의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그들의 결혼은 남편 친구와 목사가 두 사람의 사진을 주고받음으로써 성사되었다. 이들도 미국의 중소 도시에서 음식점과 호텔업 등을 하며 10남매를 키웠다. 그나마 남편은 평양 부호의 아들로 이혼한 뒤 1903년 하와이로 혼자 이민하여 사회적 기반이 웬만큼 잡힌 상태에서 혼인한 것이었다.

생활력이 강한 사진 신부로 옥성금(본명 이성금)이 있다. “친정을 도와주기 위해 미국에 왔어요. 당시 미국에는 돈이 많다는 소문이 나 있었거든요.” 1901년에 태어나 보통학교를 다닐 때 가세가 기울자 집안을 돕기 위해 15세에 미국으로 갔다. 1916년 12월 시애틀에 도착해 조영호와 결혼하고 몇 년 살다 이혼하였다. 그 후 뉴욕·리들리 등으로 이주하며 56세에 다시 70세의 옥은호를 만나 재혼하였다. 3·1 운동에 참가한 뒤 사진 신부가 된 백인명은 로스앤젤레스 조선인 사회에서 ‘만세 할머니’로 불렸다. 1898년생인 그녀는 진명여학교와 사범학교를 나와 경기도 가평과 황해도 연안 등지에서 공립학교 교사를 하다 1919년 3·1 운동을 맞았다. 그는 진명여학교 기숙사에서 만세 운동을 준비하다 발각되어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21년 12월 미국의 노총각 임지성과 사진 결혼하였다. 그녀가 사진 신부로 온 첫 번째 목적은 공부였으나 그 꿈을 이룰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벼농사를 하고 그리고 세탁소도 하는 등 시간이 모자랐다. 자녀 교육을 위해 1945년에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후 계속되는 힘들고 어려운 이민 생활에도 그는 단지 “셋째 아가야, 참고 잘 살아라. 우리 집에 다시 온다고 생각 말고 아들딸 잘 낳고 잘살아라.”하던 부모의 마지막 말을 평생토록 가슴에 새긴 채 고생을 참아냈다고 한다. 남편과 사별한 후 백낙관과 재혼한 그는 결국 한 번도 귀국하지 못하였다.

사진 신부는 미국 풍습대로 전부 남편 성을 따라 자신의 성을 바꾸었고, 남편의 활동에 적극 내조한 것은 물론 자신들도 애국 애족 여성 단체를 조직해 조선인 돕기 봉사 활동 등 사회 활동에 열성을 다했다. 이처럼 이민 생활을 안정시킨 사진 신부는 대체로 남편보다 교육 수준이 높고, 또한 젊어 도시에 나가 하숙을 치거나 아파트를 관리·경영하는 등 가계에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자녀 교육을 위한 이들의 도시 진출에는 사진 신부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남편이 먼저 죽은 사진 신부나 아내가 먼저 죽은 남자들은 자녀가 장성한 후에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하다 서로 만나 재혼도 하였다. 이로써 사진 신부들은 자녀가 미국 땅에 한민족의 뿌리를 튼튼히 내리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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