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4장 결혼에 비친 근대
  • 4. 사진결혼을 한 사진 신부들
  • 사진 신부들의 결혼 조건과 특성
신영숙

초기 사진 신부 가운데 하와이에는 경상도 출신 여성이 많았고, 서울과 평안도 출신 여성은 바로 미주 본토인 샌프란시스코로도 갔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이 지역이 부산·인천 등을 통해 해외로 나가기 쉬웠던 지리적 여건과 일찍이 근대화에 접한 여성들이 그 지역에 많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짐작된다. 사진 신부의 나이는 15∼20세였다. 평균 18세인 이들은 상대 남자들과 나이 차가 매우 컸다. 15세 차이는 보통이었고, 최고로 25세가 더 많은 신랑도 있었다.

사진 결혼을 중매한 공식적인 알선 업체가 있었다고 하기보다는 대체로 친구·친척 또는 교회 목사 등을 통해 개인적으로 소개받아 혼인하였다. 일단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들면 여성 쪽에서도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나선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때 대부분은 집안이나 주위에서 반대하였으나 부모라도 끝내 말리지는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승낙하였다. 사진 신부 가운데는 진명여학교 졸업 등의 일정한 학력이 있었고 적어도 소학교를 나온 사람이 많아 자신들의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당시 무식한 홀아비나 총각 가운데 장가는 가고 싶으나 편지도 쓸 줄 몰라 친구가 대필해 주는 경우에 발생하였다. 특히 남자들이 보내 온 사진은 대부분 그들이 이민 올 때 찍은 10여 년 전의 것으로 실제 신랑을 미국에서 만나 본 신부 중에는 사진과 크게 다른 모습에 실망해 되돌아가는 여성도 있었다. 반대로 남자 이민자들이 자기 뜻과 달리 주변에서 사진 결혼을 강요받아 괴로움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또 때로는 친구 사진을 대신 보내기까지 하여 서로 실망하는 예도 있었거니와 그보다 더 악랄한 사기 결혼의 사례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은 이혼하거나 되돌아 간 경우도 있었으나, 사진 결혼 부부는 대부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열심히 살았다. 이것은 바로 여성의 희생과 인내로 이루어진 것이다. 또 사진 신부들은 신랑 사진 하나만 가지고 일단 상하이나 요코하마로 간 다음 미국행 배에 중국인 또는 일본인 행세를 하며 타고 가야 했다. 배에 자리가 없을 때는 그곳에서 1년씩 기다리기도 하였다. 배를 타고 20일 이상 한 달이 되어야 하와이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미국 이민국인 샌프란시스코의 천사도(Angels Island)의 철저한 조사를 받고 하선 허락이 나와야 사진의 신랑을 만날 수 있었다.

이상의 사진 신부는 대체로 네 가지 특성이 있었다. 첫째 일정한 교육을 받은 머리가 명석한 여성, 둘째 열성적인 기독교 집안의 독실한 여성 신자, 셋째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와 생활력이 강한 여성, 넷째 일찍 개화한 가정에서 민족의식과 더 많은 교육을 열망한 여성 등을 들 수 있다. 일제 초기 여성들의 자유 구가와 교육 열망 그리고 경제 자립을 향한 몸부림 등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여성을 일깨우고 있었고, 민족의 일원으로 자아를 찾아 헤매는 움직임이 연애와 결혼 속에 조금씩 배어나고 있었다. 21세기, 이른바 새로운 시대, ‘여성 시대’의 실마리가 이때 확실하게 움트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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