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질문부터 시작해 보자. 일제강점기 조선인·일본인 부부의 수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표 ‘조선인과 일본인의 배우(配偶) 통계’의 조선인·일본인의 배우 관계에 있는 부부 총수를 보면 1912년 110여 쌍에서 1937년 1206쌍으로 점차 증가하고 있다. 이 통계는 정태 통계(靜態統計)로 총수는 누계치이며, 조선 총독부가 각 연도 말 조사 시점에서 파악한 상태를 나타낸다. 그리고 배우 관계라고 한 것은 호적상 신고된 혼인 외에 사실혼도 포함한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 총독부도 지적하였듯이 통계에서 빠져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혼인 시기와 신고 시기, 혼인을 한 곳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각 연도 말의 조선인·일본인 배우 관계 누계표가 보여 주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조선인과 일본인의 결혼은 당시 전체 결혼 수치에 비하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예를 들어 1929년 연말 조선인·일본인 부부의 배우 통계가 615쌍인데, 당시 조선에 사는 일본인은 10만 6022쌍, 조선인은 464만 3709쌍이었다.331)조선 총독부, 『조사월보(調査月報)』 1930년 5월호. 이렇게 조선의 전체 배우자 수와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적음을 알 수 있다. 표 ‘조선인과 일본인 결혼의 당해년 발생 건수 1’을 보면 각 해마다 결혼하는 평균적인 건수는 40여 건인데, 표 ‘조선인과 일본인 결혼의 당해년 발생 건수 2’에서 1938년 이후 결혼 발생 건수가 100여 건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에서는 일본인 남성과 조선인 여성의 결혼이 증가하는 것에 비해, 일본 내 지역에서 이루어진 결혼은 거의가 조선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의 경우였다.
(사실혼 포함. 단위 : 쌍, 지역 : 조선) | |||||
연도 | 누계 | 일본 남자+조선 여자 | 조선 남자+일본 여자 | 조선 남자가 일본인 집안에 입서 | 일본 남자가 조선인 집안에 입서 |
1912년 연말 | 116 | 56 | 57 | - | 3 |
1913년 연말 | 114 | 42 | 70 | - | 2 |
1914년 연말 | 79 | 29 | 48 | - | 2 |
1915년 연말 | 76 | 35 | 38 | 3 | - |
1916년 연말 | 149 | 59 | 85 | 3 | 2 |
1917년 연말 | 121 | 54 | 62 | 3 | 2 |
1918년 연말 | 115 | - | - | - | - |
1919년 연말 | 68 | - | - | - | - |
1920년 연말 | 85 | - | - | - | - |
1921년 연말 | 124 | 56 | 63 | 1 | 4 |
1922년 연말 | 227 | 80 | 131 | 15 | 1 |
1923년 연말 | 245 | 102 | 131 | 11 | 1 |
1924년 연말 | 360 | 125 | 203 | 23 | 9 |
1925년 연말 | 404 | 187 | 197 | 19 | 1 |
1926년 연말 | 459 | 222 | 219 | 18 | 0 |
1927년 연말 | 499 | 245 | 238 | 14 | 2 |
1928년 연말 | 527 | 266 | 238 | 21 | 2 |
1929년 연말 | 615 | 310 | 277 | 27 | 1 |
1930년 연말 | 786 | 385 | 350 | 46 | 5 |
1931년 연말 | 852 | 438 | 367 | 41 | 6 |
1932년 연말 | 954 | 533 | 364 | 48 | 9 |
1933년 연말 | 1029 | 589 | 377 | 48 | 15 |
1934년 연말 | 1017 | 602 | 365 | 43 | 7 |
✽입서(入婿)는 사위로서 여자쪽 가적(家籍)에 들어가는 경우이다. ✽조선 총독부, 『조사월보(調査月報)』 9∼11호, 1938. ✽金英達, 「日本の朝鮮統治における‘通婚’と‘混血’」, 關西大學, 『人權問題硏究室紀要』 39호, 1999(와타나베 아츠요(渡邊淳世)의 논문 55쪽 재인용) |
여기서 잠깐 법적인 경계를 살펴보자. 일제강점기 일본인과 조선인은 이른바 ‘내지적(內地籍)’과 ‘조선적(朝鮮籍)’이라는 호적으로 구별되어, 마음대로 옮길 수 없었다. 그리고 조선인과 일본인은 각각 준거법(準據法)이 달랐다. 일본인은 일본 민법에, 조선인은 ‘조선 민사령(朝鮮民事令)’의 적용을 받았다. 식민지 조선에는 1912년 4월 1일부터 시행된 ‘조선 민사령’에 따라 가족법이 규정되었다. 이는 일본 민법이 의용(依用)되었는데, 제11조에서 친족·상속에 관한 규정은 관습법(慣習法)을 적용시켰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사실혼(事實婚)도 인정되었다. 그러면 조선인과 일본인이 만나 결혼하면 어떤 법을 적용하여 결혼 성립을 인정하였을까?
(단위 : 쌍, 지역 : 조선) | |||||
연도 | 누계 | 일본 남자+조선 여자 | 조선 남자+일본 여자 | 조선 남자가 일본인 집안에 입서 | 일본 남자가 조선인 집안에 입서 |
1928 | 40 | 11 | 21 | 8 | - |
1929 | 48 | 21 | 21 | 6 | - |
1930 | 66 | 27 | 30 | 9 | - |
1931 | 52 | 21 | 27 | 4 | - |
1932 | 55 | 22 | 29 | 4 | - |
1933 | 48 | 27 | 15 | 4 | 2 |
1934 | 45 | 25 | 16 | 4 | - |
1935 | 19 | 4 | 14 | 1 | - |
1936 | 40 | 21 | 16 | 3 | - |
1937 | 49 | 21 | 23 | 3 | 2 |
혼인의 성립 요건은 당사자가 속한 지역 법령에 따라, 방식은 혼인 거행지의 법령에 따라(일본에서 했으면 신고주의, 조선에서 했으면 사실혼 인정), 효력은 남편이 속하는 지역의 법령에 따라 인정되었다. 다만 조선인이 일본 여자 호주와 결혼해 그 가적(家籍)에 들어갔을 때는 일본 민법의 적용을 받았다. 이렇게 복잡한 적용은 당사자들의 호적이 정리되지 않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래서 1921년 6월 7일 조선 총독부는 ‘내선인 통혼 법안’을 발표해 민적 송부를 원활하게 하려고 하였다.332)「內鮮人の通婚民籍手續に對して」, 『朝鮮』 79, 95쪽 ; 최유리, 「일제하 통혼 정책과 여성의 지위」, 『국사관논총』 83, 140쪽 재인용. 이 법안에서는 조선에서 거행된 조선인·일본인의 결혼을 신고하도록 하였고, 이는 혼인에 따른 변동을 민적부(民籍簿)에 기재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단위 : 쌍) | ||||||||||
연도 | 전체 총수 | 일본 내 | 조선 내 | 기타 | ||||||
일본 총수 | 일본 남자+조선 여자 | 조선 남자+일본 여자 | 조선 남자가 일본인 집안에 입서 | 조선 총수 | 일본 남자+조선 여자 | 조선 남자+일본 여자 | 조선 남자가 일본인 집안에 입서 | |||
1938 | 907 | 811 | 9 | 556 | 246 | 74 | 51 | 13 | 10 | 22 |
1939 | 1005 | 887 | 27 | 615 | 245 | 99 | 72 | 21 | 6 | 19 |
1940 | 1213 | 1084 | 16 | 819 | 249 | 106 | 73 | 27 | 6 | 23 |
1941 | 1416 | 1258 | 30 | 946 | 282 | 121 | 71 | 43 | 7 | 37 |
1942 | 1528 | 1418 | 134 | 1028 | 256 | 110(조선 지역 총수+기타 지역) | ||||
✽기타 지역은 대만·사할린·중국 동북부·외국 등의 수치를 합했다. ✽조선 총독부, 『조선 인구 동태 통계 조사』, 1938. 제79회 제국 의회 설명 자료, 제86회 제국 의회 설명 자료. 森田芳夫, 『數字が語る在日韓國·朝鮮人歷史』, 明石書店, 1996, 76쪽. |
그리고 1922년 12월 7일에는 ‘조선 민사령’ 제11조를 개정하여, 혼인을 부윤 또는 면장에게 신고해야 효력이 발생하도록 규정하였다.333)이승일, 「조선 총독부의 법제 정책에 대한 연구-조선 민사령 제11조 ‘관습’의 성문화를 중심으로-」, 한양대 박사학위논문, 2003, 163쪽. 표 ‘조선인과 일본인의 배우 통계’에서 1923년경 숫자가 증가하는 것도 이렇게 정비된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1923년 7월 ‘조선 호적령’을 시행하여, 호적 제도라는 일본식 ‘가(家, いえ)’ 제도의 개념을 형식으로나마 조선에 도입하여 적용하였다. 이러한 ‘조선 민사령’ 개정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혼인과 그에 따른 이적(移籍)을 법적으로 승인하였을 뿐, 조선인들의 전적(轉 籍)을 제도적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1939년 ‘조선 민사령’ 개정을 통해 조선인에게 일본식 씨명을 강요하고 서양자(婿養子) 제도가 도입되었으나, 조선인과 일본인은 여전히 호적으로 구별되었고, 다른 지역으로의 ‘본적 전속(本籍轉屬) 금지(일본과 식민지 지역 간에 본적을 이동할 수 없는 것)’는 엄격히 유지되었다.334)이승일, 앞의 글, 245쪽. 일제의 식민 정책 특성이 호주를 중심으로 한 가족 편제 방식과 연결되면서, 끊임없이 ‘경계’를 설정하게 만들었고, 가부장제 권력을 강화시키기도 하였다.
앞의 표에 나온 입서(入婿)의 형태는 조선인 남성이 ‘일본적(日本籍)’으로 이적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를 통해 도항의 자유, 은행·공적 기관에서 신용을 얻는 점, 일을 하기 쉬운 점, 급료가 일본인 수준으로 되는 점 등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조선인 남성은 일본에서 살아갈 생활 수단을 얻는 것이었고, 일본 가(家) 쪽에서 볼 때는 일손을 얻는 것이었다.335)森本和美, 「移住者たちの‘內鮮結婚’」, 『植民地主義と人類學』, 關西學院大學出版會, 2002, 305쪽.
다시 통계로 돌아가 보자. 이런 통계 수치에 나타난 조선인·일본인은 주로 어떤 계층이었을까? 조선에 거주하는 조선인·일본인 부부 가운데 남자 배우자의 직업별 구성을 살펴보면, 상업·교통업 종사자가 많았고, 그 다음이 공무업·자유업 그리고 공업의 순이었다. 이 가운데 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비율이 증가하였는데, 이는 1930년대 조선 북부 지방의 공업화가 본격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일본인 남자와 조선인 여자의 경우, 공무·자유업의 비중이 높다가 1930년대 후반에는 공업의 비중이 가장 높아졌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집중적으로 종사하였던 직업도 상업·교통업, 공무·자유업, 공업의 순이었다. 조선인 남자와 일본인 여자의 경우, 상업·교통업이 계속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그 다음이 공무·자유업이었다. 이는 조선인이 직업상 일본인과 접촉을 많이 하는 분야의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직업별 구성은 지역 분포에서도 드러난다. 조선인·일본인 부부들은 경기도에 제일 많았고 경남, 전남, 경북 순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일 제강점기 일본인은 경기도와 경상남도에만 40∼45% 이상이 거주하고 있었다. 또한 약 80%가 도시 생활자였다. 경성부가 있는 경기도, 부산이 있는 경상남도, 대구가 있는 경상북도가 그러하다. 또한 1930년대 이후에는 앞서 공업 종사자가 증가한 것처럼 평북, 함남, 함북의 분포율이 증가하였다.336)최유리, 앞의 글, 151∼154쪽. 이렇게 전체적인 인구 비례상 많은 수는 아니었던 이들 조선인·일본인 부부의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