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4장 결혼에 비친 근대
  • 5. 조선인과 일본인의 결혼
  • 어떻게 만났을까
김미현

초기에 일본인과 조선인이 결혼하는 사례는 공간의 경계를 넘을 수 있었던 계층에서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 중에는 식민지 지배를 위해 조선으로 오는 관료들, 상업을 하는 자가 많았고, 반대로 조선인 중에는 일본으로 간 유학생이 대부분이었다.

『매일신보』 1917년 5월 3일자에는 경북 영천군 읍내에서 상업을 하는 문명기가 돗토리현(鳥取縣) 사족(士族) 마에다(前田掌子)와 결혼식을 하고 지난달에는 성대한 피로연을 거행하였다고 소개하면서, “일선인의 정식 혼인은 아직까지 드문 일이라더라.”고 덧붙이고 있다. 일본의 몰락한 상인·사족·농민들은 청일 전쟁·러일 전쟁을 계기로 조선으로 왔고, 그 중에는 상업을 목적으로 하는 이가 많았다. 앞의 사례에 나오는 문명기는 이런 일본 상인과 관계를 맺었던 것은 아닐까?

조선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는 데 명성이 높았던 서대문 경찰서 고등주임 요시노 후지조(吉野藤藏)도 러일 전쟁 전에 조선에 들어왔다. 그는 함경남도 이천군 문천의 사립 보통학교에서 일하다가, 이천 군수 이문하의 딸과 1905년 결혼한다.337)「內鮮一體結婚の先驅-吉野さん家庭訪問記」, 『內鮮一體』 1940년 1월호, 43∼45쪽. 이렇게 일본인에게는 ‘식민지 정착’이고, 조선인에게는 식민지 권력에 접근하는 면이 있었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주 독자로 한 잡지 『조선급만주(朝鮮及滿洲)』 1917년 11월호에는 ‘내선 결 혼자와 그 가정(內鮮結婚者とその家庭)’이란 이름으로 일본인 부인을 둔 조선인으로 자작 조중응, 경무통감부의 구연수, 함남 장관 신응희, 강원도 장관 이규완, 충남 참여관 정남교, 중추원 부참의 정진홍 등을, 조선인 부인을 둔 일본인으로 경무통감부의 경시 와타나베 다카타로(渡邊鷹太郞), 『경성일보』의 이사이자 『매일신보』 간사인 나카무라 겐타로(中村健太郞) 등을 소개하였다.338)渡邊淳世, 「일제하 조선에서 내선 결혼의 정책적 전개와 실태」,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25쪽.

조선인 남성이 일본으로 유학 가서 일본인 여성과 만나는 경우도 많았다. 왕세자 이은(李垠)과 일본 왕족 마사코(方子)의 결혼을 축하하는 차원에서 기획된 신문 기사에 소개되는 의사 안상호, 포목점주 김현태도 유학이 계기였다.339)『매일신보』 1918년 12월 11일자.

이들과 달리 정치 운동으로 연결된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박열(朴烈)의 만남도 들 수 있다. 박열은 3·1 운동에 참가한 뒤 경찰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가 무정부주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 가네코 후미코와 만나 동지적 생활을 하며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여 같이 활동하였다.340)야마다 쇼지, 정선태 옮김, 『가네코 후미코-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 산처럼, 2003.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이동하는 일이 늘어감에 따라 이들도 일본인과 결혼하는 경우가 생겼다. 1920년대는 조선인 남성 노동자의 단신 이주가 많았고, 이른바 ‘내선 융화(內鮮融和)’라는 정치적 구호 속에서 일본인과의 결혼을 장려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도쿄에서 1920년 조직된 친일적 노동 단체인 상애회(相愛會)는 무료 숙박, 직업 소개 등의 사업 외에 결혼 소개부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들은 “종래 내선 결혼이라고 하면 대개 조선인 남자에 내지인 여자가 결혼하는 것인데, 상애회에는 조선인 여자를 내지인 남자에 시집보내는 데 노력할 것.”을 내세우고 있었다.341)『東京朝日新聞』 1928년 1월 19일자. 鈴木裕子, 『從軍慰安婦, 內鮮結婚, 性の侵掠, 戰爭責任を考える』, 未來社, 1992, 106쪽 재인용. 1930년대가 되면 조선인 노동자가 가족을 데리고 이주하여 정착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재일 조선인 사회의 인구도 증가한다. 또한 전시 체제기에 강제 동원되어 일본으로 가는 조선인 노동자의 수도 증가하였다. 앞에 나온 표 ‘조선인과 일본인 결혼의 당해년 발 생 건수 2’를 보면 조선인 남자가 일본인 여자와 결혼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이는 단순하게 추정할 수 없지만, 재일 조선인의 수적 증가, ‘내선 일체(內鮮一體)’ 구호 속에서 신고율의 증가 등 여러 요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한편 서울의 일본인 사회가 커지면서, 조선에서 일본인 남성과 조선인 여성이 만나는 경우도 늘어갔다. 진고개 등지의 일본 상인 집에서 식모로 일하는 조선인 여성이 그 집의 남자 점원들과 한솥밥을 먹게 되고, 날마다 만나서 이야기도 하게 되는 기회가 많아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다.342)『동아일보』 1928년 3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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