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4장 결혼에 비친 근대
  • 5. 조선인과 일본인의 결혼
  • 생활의 단면
김미현

조선인·일본인 부부를 소개한 신문과 잡지는 대개 이들 가정이 일본식 관습과 생활 방식을 잘 실현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조선인들은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자녀에게는 일본식 교육을 시키는 등 일본인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 강조되었다.343)渡邊淳世, 앞의 글, 25∼26쪽. 1920년대 ‘내선 융화’ 차원에서 소개되는 부부나, 1940년대 ‘내선 일체’ 차원에서 소개되는 부부나 ‘일본식 생활 문화’를 체현하고 있다는 식의 묘사는 거의 비슷하다. 그러면 이들은 기존 가족 질서와의 갈등은 없었을까?

영감이 내지에 있을 때에 얼마나 풍을 쳤소. 조선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병신 같고 영감 혼자만 잘난 듯 조선에 돌아가는 날에는 벼슬은 마음대로 할 듯, 돈을 마음대로 쓰고 지낼 듯 그런 호기쩍은 소리만 하던 그 사람이, 조선을 오더니 이 모양이란 말이오? 일본 여편네가 조선 사람의 마누라 되어 온 사람이 나 하나뿐 아니건마는 경성에 와서 고생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구려. 남편 덕에 마차 타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머리 위에 금테를 두셋씩 두르고 다니는 사람의 마누라 된 사람은 좀 많소?(이인직의 「빈선랑(貧鮮郞)의 일미인(日美人)」 중에서)344)『매일신보』 1912년 3월 2일자 ; 임형택, 『한국 현대 대표 소설선』 1, 창작과 비평, 1996.

기존 관계망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회를 찾고 싶은 것, 계층의 상승 등 일본 여성들은 생활 조건에 대한 기대치 속에서 조선인 남성과 결혼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생활과 가족 관계, 각자의 공동체에 쉽게 적응되지 않는 측면도 있었다.

앞서 언급한 일본 유학을 통해 만나게 된 김현태와 사요는 1907년경 도쿄에서 만나 결혼하였다. 졸업을 앞둔 김현태를 놔두고, 사요는 먼저 조선에 들어와 시부모와 살기 시작한다. ‘머리만 구름머리일 뿐이고 그 밖에는 옷·치마·버선까지 모두 조선 물건인’ 사요의 생활은 “처음에 나왔을 때 조선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풍속도 모르고 아주 고생이 적지 않았지요. 그러나 두서너 달 지나니까 알겠어요.” 그리고 일본 사람은 한 사람도 모르고 출입도 많이 하지 않고, 집안 살림만 하는 것이었다.345)『매일신보』 1918년 12월 11일자.

화가 최근배의 부인인 치요코(千代子)는 1937년 잠시 들른 것이라 생각한 조선에서 시부모와 살게 된다. “풍속이나 습관에 따라, 그 생활 감정에 그렇게 꼭 일치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 일치하기를 바라는 것도 무리입니다. 그이를 따른 이상, 그의 가풍대로 또 여기 습관대로 하는 게 옳은 일이라 생각하며 지내고 있습니다.”346)「內鮮結婚の藝術家 家庭記」, 『삼천리』 13권 3호, 1941년 3월. 두 경우 시기별로 조선 내 일본인 사회가 자리 잡은 정도가 다르긴 하지만, 일본 여성들도 조선의 가부장제에 어떤 방식으로든 적응해야 했다. 물론 ‘일본 가정’이 문명을 체화한 것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여성·조선 여성의 처지가 같지만은 않을 것이다.

본실이 죽은 뒤 장사가 끝나자 남편과 싸움싸움하여 큰 집 차지를 할 제는 다른 조선 첩들과의 경쟁심으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자기와 자식들의 지위와 장래를 좀 더 튼튼히 하려는 생각으로이었다. 장성한 자식을 둘씩이나 낳아 주었고 이십여 년이라는 세월을 남가의 집에서 썩었다는 것만 생각하여도 네 활개를 칠 일인데 민적에는 자기 앞으로 아니 되었을망 정 자기 속으로 나온 충서가 어엿이 남 씨의 집 장남인 다음에야 기생 퇴물이요, 일본 사람이라는 이유로만 미좌서의 요구를 거절당할 까닭은 없던 것이다(염상섭의 「남충서」 중에서).347)「동광」 1927년 1∼2월 ; 『한국 현대 대표 소설선』 1, 창작과 비평, 1996.

결혼한 조선인 남자가 본처가 있어 중혼 형태로 되거나 첩으로 전락하는 일본인 여성도 많았던 듯하다. 대구에 살던 한 일본 여성은 조선인과 결혼하여 살았는데, 나중에 본처가 있음을 알게 되어 사기 결혼에 대한 청구 소송을 하게 된다.348)『동아일보』 1929년 5월 28일자.

폐쇄적인 생활을 하거나 일본인 공동체 사회하고만 교류하면서 자신들의 가정을 유지한 경우도 있다. 의사 안상호와 부인 이소코(磯子)의 경우를 보자. 방문한 기자가 “혹시 시골에서 일가들이 오시면 어떻게 하십니까?”라고 묻자 안상호는 “나는 고독한 사람이 되어서 찾아올 일가가 없어요. 가족이 단출하지요. 조선 사람과 그리 상종하는 일이 없으므로 불편한 것은 없어요. 이것을 불행 중 다행이라 하는지요.”라고 대답한다. 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11년 동안을 조선에 있었어도 조선말은 한 마디도 못해요. 그리고 보시는 바와 같이 아이들이 많아서 출입도 잘 못해요. 한 달에 진고개나 한 번씩 갈 뿐이고 아이들도 집 앞에 바로 전찻길이기 때문에 단속하여 내보내지 아니하므로 우리 식구들은 딴 세상에 사는 셈이지요.”349)『매일신보』 1918년 12월 10일자.

이런 중상층이 아닌 다른 계층의 조선인·일본인 부부들은 어떠하였을까? 하층민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신문 기사나 잡지에 실린 사건은 의외로 많지 않은데, 몇몇 사례를 보자. ‘용산서에 가련한 미인, 일본인과 못살겠다고’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것은 일본인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조선인 여성의 사연이다. 김매향이 조선인이라 속인 일본인과 결혼하였고, 폭력에 시달리다 도망쳐 경찰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내용이다.350)『동아일보』 1924년 12월 19일자. 사기 중매에 속아 일본인 남자와 결혼한 조선인 여성이 오히려 일본 남자에게 결혼 비용 청구 소송을 당했다는 기사도 눈에 띈다.351)『동아일보』 1924년 12월 4일자. 조선어 신문들이 이런 사건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폭력적이고 금수 같은’ 일본인 남성의 손에 가련한 조선인 여성이 시달렸음을 동정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이들 여성이 조선인으로 알고 속았다는 점은 정보가 부족했을 수도 있지만, 사건화되었을 때 주변 조선인들의 힐난에 대응하는 나름의 방식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중혼·사기 결혼·내연 관계에 부딪치고, 공식적인 결혼 관계를 인정받지 못한 조선인 여성이 상당히 많았다. 한편 조선인·일본인 부부의 자녀들은 어떤 위치에 있었을까? 이른바 ‘혼혈아’로서 이들은 어느 공동체에 소속되었다고 느끼고 있었을까?

언젠가 PP단의 동지의 한 사람이 별안간 “여보게 야노 군 ……미나미 군 ……남 군!” 하며 혀가 돌 새도 없이 연거푸 불러 놓고 나서 “온 자네 같은 부르조아지는 성(姓)도 많으니까 한참 부르고 나면 숨이 차이 그려!”

하며 여러 사람을 웃긴 일이 있었다. 여러 사람은 웃었으나 충서는 쓰린 웃음을 체면에 못 이기어서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말하자면 나는 야노(失野)도 아니요, 미나미도 아니요, 남가(南家)도 아닐세마는 그러나 그 중에 제일 적절히 나(我)라는 존재를 설명하는 것은 ‘미나미’라고 부르는 것이겠지! 야노도 아니요, 남가도 아닌 거기에 내 운명은 기묘한 전개를 보여 주는 걸세”(염상섭의 「남충서」 중에서).352)「동광」 1927년 1∼2월 ; 『한국 현대 대표 소설선』 1, 창작과 비평, 1996.

아버지·어머니가 갖는 정치적·문화적 지위 차이는 자식들에게 정체성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당시 조선어 신문에는 이들에 대한 주목 자체가 적은 가운데, 혼혈아를 주로 가엾은 소년의 눈물겨운 이야기로 소개하였다. 가출한 소년들은 ‘조선 땅을 그리워하여’, ‘어머니를 찾아서’ 돌아다닌다. 이들에게는 혈육의 사랑이 결핍되어 있으며, 이 점에 동정적인 시선이 가 있다.353)『동아일보』 1928년 3월 21일자 ; 『중외일보』 1928년 8월 1일자 ; 『조선중앙일보』 1935년 11월 5일자. 일본인 아버지는 조선 남부 지방에서 토목 공사에 종사하고, 조선인 어머니와 동생과 지내는 야마네 요시오(山根義雄)는 평양 요리점에서 음 독자살을 시도한다. 그는 평양에서 일본인 중학교를 마치고, 평양과 경성에서 일본 신문 기자로 있기도 했는데, ‘자기네 부모의 이야기를 하면 더욱 말을 피하여 항상 적막한 일면을 가져오다가, 이편에도 저편에도 서지 못하는 혼혈아의 딱한 처지’를 비관하였다는 것이다.354)『중외일보』 1927년 11월 26일자.

“저 녀인은 조선 사람입니다. 남편은 일본 사람인데 그야말로 무서운 악당이요.” 리 군은 손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으려다가 문득 곁에서 어물거리고 있는 야마다 하루오를 발견하자 무서운 기세로 소년에게 접어들었다.

“바로 이놈이오. 이놈의 애비요.” 그는 야마다의 손목을 잡고 팔을 비틀면서 마치 범인이라도 체포한 것처럼 “이놈의, 이놈의…….” 하고 입에 거품을 물고 부르짖었다. 그 목소리는 너무도 흥분한 나머지 울음소리로 변하고 있었다. 야마다는 몹시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올리며 “아니에요, 아니에요.” 하고 울부짖었다. “조선 사람 따위는 우리 어머니가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니에요”(김사량의 「빛 속으로」 중에서).355)『김사량 작품집』, 살림터, 1992.

식민주의 권력과 가부장제가 교차하는 가운데, 일본인 아버지·조선인 어머니와 조선인 아버지·일본인 어머니는 차이가 있었다. 계층의 문제를 더해 볼 때 더 복잡해지지만, 조선인 아버지는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식민주의 권력 관계를 인정하는 자는 더욱 자녀를 ‘일본인’으로 편입시키려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경무관인 구연수(具然壽)는 “조선의 사회를 개척하려면 제일 인종을 개량하여야만 하고, 인종을 개량하려면 내지인 아내를 많이 데려와야 하오.”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는 일본인 아내가 전처의 아이들을 “제가 낳은 자식처럼 길러 지금은 내지 사람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지요.”라며 흡족해한다.356)『매일신보』 1918년 12월 9일자. 애국부인회 조선본부 인보관(隣保館)에서 일하는 주임 채홍석(蔡鴻錫)은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1918년에 일본인 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아이들이 자람에 따라 생각 없는 사람들의 지 탄을 받지 않도록’ 아이들을 일본인같이 자라도록 엄격하게 하며, ‘아이는 절대 내지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믿고 있다.357)『경성일보』 1939년 1월 17일자. 그러나 이렇게 욕망하는 만큼 일본인으로 편입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