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4장 결혼에 비친 근대
  • 5. 조선인과 일본인의 결혼
  • 민족 간의 결혼을 보는 시선
  • 3·1 운동의 충격과 ‘내선 융화’의 등장
김미현

조선인과 일본인의 남녀 관계는 호주를 중심으로 한 가부장적 가족 질서, ‘제국 일본인’과 ‘피식민 조선인’의 위치·언어·풍습 등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었다. 조선 민족의 ‘고유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일본인의 ‘지도적 위치’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일본인끼리도 의견이 갈리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는 조선인·일본인 결혼이 어떤 식으로 긍정되기도 하고 우려되기도 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인과 일본인의 결혼은 피식민자와 식민자의 결합이라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식민 정책의 동화주의라는 관점에서 주목되기도 하였다. 이런 면이 조선 총독부의 정책 기조에 드러나는 시기는 1920년대이다.

1919년 3·1 운동은 일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일제가 강점 상태를 긍정하기 위해 들고 나온 것은 다시 ‘일선 동조론(日鮮同祖論)’과 ‘혼합 민족론’이었다. 일본과 조선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고, 언어적·인종적으로도 동일하다고 주장하였다.358)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 조현설 옮김, 『일본 단일 민족 신화의 기원』, 소명출판, 2003, 207쪽.

이렇게 ‘내선 융화’를 주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1920년 4월에 거행된 왕세자 이은과 일본 왕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의 결혼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융합을 위한 상징적 예이자, 조선인·일본인 결혼의 모범적 예로 선전되었다. 이완용(李完用)은 “내선 귀족에서부터 일반 인민에 이르기까지 통혼하여 동화의 실을 거두기 바라노라.”라고 하고, 남작 한창수(韓昌洙)는 “내선인의 결혼도 점차 실행되어 내선인 일가의 이상이 실지로 현출(現出)될 것이 멀지 않은 것 같다.”라고 칭송하였다.359)『매일신보』 1916년 8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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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 결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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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해 상해 임시 정부는 ‘2000만 민족이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분투하는 한창 중간에 왜주(倭主)의 일족인 여아와 불의의 혼인을 맺는 것’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금수가 아니고 엇지 참아 그 부황과 모후를 시하고 그 황위를 탈하고, 그의 동족을 잔해하는 구인(仇人)의 녀를, 그의 2000만 형제와 자매가 조국을 위하려 혈전하는 이때에 취할 심장이 생하리오.”라며 비난하였다.360)『독립신문』 1920년 5월 8일자.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아직도 조선 민중 중에, 또는 일본인 중에 공리 관념에 잡혀 백주에 중인에 대해 공연히 정략결혼을 창도(唱導)하며, 그 부끄러운 바를 모르는 자가 있고, 심한 자는 이를 선전하는 폐풍(弊風)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남녀 일생 대사인 결혼’은 정략적으로 할 수는 없다며 비판하였다.361)『동아일보』 1922년 1월 29일자.

이렇게 조선 민족을 위협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은 이때만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소문은 그런 면을 보여 준다. 『매일신보』 1910년 10월 16일자에 ‘풍설(風說)과 조혼(早婚)’이라는 사설을 보면, 조선에 조혼이 성행한다고 비난하면서, “이번에 그 원인을 사찰한 즉 결혼법을 제정한다, 결혼세를 징수한다, 내지인과 강혼(强婚)하게 한다는 무지불측(無知不測)의 풍설이 번성하여 조혼이 심해졌다.”고 지적한다. ‘한일 병합’이라는 정치적 사건은 조선인의 혼인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자, 위협적인 것으로 느껴졌던 것이다.362)渡邊淳世, 앞의 글, 50쪽.

다음의 사례도 조선인 공동체의 반발을 보여 준다. 박영(朴永)은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히로시마 중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고 있다. 히라다(平田)라는 일본인 여성과 각각 부모의 허락을 받고 정식으로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게 되어 결혼 피로연을 열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같이 공부하던 유학생들은 우리 조선인 모두 일본인에게 학대와 업신여김을 받는데, 일본인과 혼인하는 것은 우리의 사정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고 매우 분개하여 박에게 권고를 하였으므로, 박영은 크게 근심하여 근무하던 학교 교장에게 퇴직원을 제출하였고, 이 말을 들은 당지(當地) 경찰서에서는 전기(前記) 배일(排日) 유학생의 행동을 주목하는 중이다.”라는 것이다.363)『동아일보』 1921년 5월 23일자. 한편 일본인 가운데서도 조선인·일본인의 결혼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었다. 교토 제국대학 교수인 가와가미 하지메(河上肇)는 1915년 ‘인종 문제’라는 제목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을 혼혈시켜 중간 인종을 얻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참을 수 없는 바이다.”라고 주장하였다.364)오구마 에이지, 앞의 글, 310쪽.

조선 연구회 주간이자 『경성신문』 사장인 난바(難波可水)는 ‘통혼의 정치적 효과, 즉 내선의 혼혈아가 조선의 사회를 지배하는 시대가 올 때까지 너무나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 결혼이란 것 자체가 정치가가 강요해서 될 성질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조선 총독부의 동화주의 정책 기조를 비난했다.365)難波可水, 「內鮮人通婚の狀態如何」, 『朝鮮及滿洲』 1917년 11월호. 渡邊淳世 , 앞의 글, 40쪽 재인용. 아오야기 난메이(靑柳南冥)는 일본 식민자가 소수인 상태에서는 반대로 일본인이 조선인에 동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우생학적으로 조선인과의 결혼은 열악한 유전자를 생성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혈통 달라서 생겨난 ‘민족혼’의 차이가 존재하며, 이는 3·1 운동에서 이미 경험한 바와 같다고 주장한다.366)靑柳南冥, 「總督政治史論」, 1928. 渡邊淳世, 앞의 글, 42쪽 재인용. 조선 총독부와 일본인 논자들 사이의 이런 차이는 ‘문명을 전파한다는 제국주의적 시선’을 공유하면서, ‘지배 민족의 경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둘러싼 차이였다.

반대로 조선인들에게는 조선 민족을 위협하는 것이자, 정치적으로 이용당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1931년에 대중 잡지 『삼천리』에 ‘이민족과의 결혼 시비’라는 기사가 났는데, 덕혜 옹주(德惠翁主)의 결혼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1931년에는 고종의 막내딸 덕혜 옹주가 전 쓰시마 번주(對馬藩主)의 아들 쇼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결혼하고, 고종의 손자 이건(李鍵)도 마츠히라 요시코(松平佳子)와 결혼하였다. 논자들은 정치·경제적으로 불순한 동기로 이루어지는 정략결혼은 반대한다는 태도를 공통으로 보였다. 김병로(金炳魯)는 “당분간 민족의 고유성을 보존하여 혼혈을 피하는 필요상 우리는 제 민족끼리 결혼할 것.”이라고 하고, 한용운(韓龍雲)도 ‘동화적(同化的)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조선 민족의 순결을 위하여 어대까지든지 피하지 않으면 안 될 줄 안다.”라고 하였다. 황에스터도 “말이 다르고 수천 년을 흘러 내려오는 풍속 습관이 맛지 안코 그러고 업는 듯하면서도 가슴속 깁히 흘너가는 민족 감정 때문에 불행해질 뿐이다.”라고 하였다. 우봉운(禹鳳雲)은 관리에 등용되기 쉽고,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쉽다는 이유로 하는 “인형적·허영적 결혼을 배격하여야 한다. 무슨 정책상에 하는 결혼, 엇더케나 더러운가.”라며 질타하였다.367)「이민족과의 결혼 시비」, 『삼천리』 3권 9호, 1931년 9월.

1930년대에 들어서면 이민족과의 결혼은 통속화된 연애담의 소재로 등장한다. 러시아 미인과의 사랑, 상하이에서 만난 영국 해병, 도쿄에서 만난 조선인 청년과의 사랑은 이국적인 풍경 속에 배치되며,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애달픈 사연이 된다.

“‘미스터 김’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니드니 후지이(藤井) 씨의 얼골색과 동작이 달너지는 것이 보여젓슴니다. 여러분 놀나지 말어 주십시요. 후지이 씨는 틀님업는 ‘미스터 김’이엿슴을 알게 되엿스니 그로부터의 나의 맘이 얼마나 우울하여젓겟슴닛가.”368)「이민족 간 연애의 비극(실화 3편)」, 『삼천리』 4권 3호, 1932년 3월.

사연을 전하는 화자는 일본 여성이며, 이들의 비극성은 자신을 숨겼던 조선 남성에게서 출발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사랑에 빠진 젊은 일본 여성 이 화자이지만, 이를 읽은 조선인 독자들은 식민지 권력 관계를 의식하고 대등하지 못한 자기 위치를 의식하는 조선인 청년의 자신 없는 태도와 교감하지 않았을까. 애상적인 태도는 ‘그녀’에 대한 것이기 보다 ‘자신(조선인 남성)’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인 여성과 일본인 남성의 만남을 다루는 방식과 달리, 낭만화된 공간에 배치되는 점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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