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4장 결혼에 비친 근대
  • 5. 조선인과 일본인의 결혼
  • 민족 간의 결혼을 보는 시선
  • ‘내선 일체’ 속의 동원과 배제
김미현

1920년대 ‘내선 융화’라는 정치적 구호와 함께 주목받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결혼은 ‘내선 일체’라는 구호로 동원하던 전시 체제기에 다시 주목을 받게 된다. 조선 총독부는 전쟁에 조선인을 동원하기 위해 ‘황국 신민(皇國臣民)’으로서 ‘내선 일체(內鮮一體)’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이 차원에서 ‘내선인의 통혼 장려’를 말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행 정책으로 추진했다기보다는 구호를 통한 정치적 제스처에 가까웠다. 조선인·일본인 간의 결혼은 조선인의 지위를 확인하려는 친일적 조선인이 더 강하게 주장하는 상황이 된다. 그들은 사회·정치적 차별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내선 결혼’을 통해 말하고 증명하려 했다. 현영섭(玄永燮)도 그런 경우인데, 1938년 ‘내선 결혼론’에서 실제 생활에서 행복한 결혼이 가능하도록 여건이 마련되어야 ‘내선 일체’가 완성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내선 결혼’을 방해하는 요소로 조선인의 사회적 지위가 낮은 것, 상호 경멸하고 반목하는 것, 일본식 생활양식으로 자라나도 조선적에 편입된 자는 여전히 조선인으로 묶여 있는 점을 들었다.369)이승엽, 「녹기 연맹의 내선일체 운동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석사학위논문, 2000, 71쪽. 녹기 연맹(綠旗聯盟) 계열의 내선 일체 실천사는 1940년 1월 잡지 발간과 함께 결혼상담소를 개설하고 이를 통해 ‘내선 결혼 운동’을 펼쳐나간다. 그리고 이런 자신들의 움직임을 조선 총독부도 지원해 주길 원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1941년에 한 번 ‘내선 결혼’을 한 사람을 표창하는 정치적 행동을 취한다. 국민 총력 조선 연맹은 1940년도에 결혼한 137쌍에게 미 나미(南) 총독이 ‘내선 일체’라고 쓴 족자 한 개씩을 기념품으로 증정하였다. 이 가운데 조선인 남자가 일본인 여자와 결혼한 것이 106쌍, 조선인 여자가 일본인 남자와 결혼한 것이 31쌍이었다.370)조선 총독부, 『조선』 1941년 4월호 휘보.

하지만 일제로서는 군인으로, 노동자로 조선인을 동원하면서도 지배의 위계는 허물지 않아야 했다. 일본 내에서는 우생학 차원에서 혼혈을 비난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1943년 후생 대신의 명령으로 후생성 연구소 인구 민족부는 ‘야마토 민족을 중핵으로 한 세계 정책의 검토’라는 정부 기밀 자료를 작성했다. 이 문서는 혼혈 방지를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있는데, 잡혼 부부는 그 민족의 평균인보다도 사회적 지위나 지능이 열등하고 더구나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는 경우가 많아 가족 제도의 해체까지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차원에서 일본 거주 조선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의 결혼 사례를 검토하여, 그 혼혈아는 ‘수치심이 없고 국가 정신이 박약’ 하다고 주장한다. 또 조선인 남성을 ‘내지인으로 오인’ 하여 결혼한 경우가 많은 것은 “과도기적인 내선 일체론과 창씨개명(創氏改名)에 기초한 비극적 측면.”으로 묘사하였다. ‘황민화 정책’과 총동원 정책은 진행되면 될수록 순혈주의를 무너뜨리는 성격을 일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면서도 조선인을 인적 자원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엄중하게 격리하고, 필요가 없어지면 송환하기를 원하였다.371)오구마 에이지, 앞의 책, 330∼333쪽.

한편 1941년에 조선 총독부 경무국 보안 과장인 후로카와 가네히데(古川兼秀)는 나치의 영향을 받은 ‘순혈 오염론(純血汚染論)’의 대두를 비난했다. 그는 ‘내지의 중견 관료 중에도 그런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 있는 듯하지만, 적어도 내선 관계에 있어서는 그릇된 주장’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될 경우 조선인은 ‘혼인 금지 정도가 아니라 황국 신민이 아니게 되므로’ 황민화(皇民化) 정책도 징병도 불가능해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372)오구마 에이지, 앞의 책, 316쪽.

조선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만든 지원병 선전 영화 ‘그대와 나(君と僕)’ 속의 한 장면은 오히려 이런 우려를 역으로 보여 주는 듯하다. 영화에 서 한 일본인은 처제에게 조선인 지원병과 결혼하라고 권유한다. 그 이유로 “내선 결혼은 우생학적으로 매우 좋은 것이어서 후생성에서도 총력 연맹에서도 특히 내선 결혼을 장려한다.”라고 말한다.373)이준식, 「문화 선전 정책과 전쟁 동원 이데올로기-전시 동원 체제의 영화 정책을 중심으로-」, 『일제하 파시즘 지배 정책과 민중의 생활상』, 혜안, 2003.

내선 결혼 반대를 주장하는 자도 있었고, 조선 총독부의 내선 일체론이 하나의 방침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쪽에서는 민족의 독자성을 말살시켜 동원하자고 했던 데 비해, 다른 한쪽은 이민족이 유입되는 것을 기피하고 차별의 근거인 민족의 구별이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374)오구마 에이지, 앞의 책, 336쪽.

그렇다면 이런 논의 속에서 내선 결혼은 어떤 정치적 효과를 거두었을까? 조선 총독부는 점차 내선 결혼 자체보다는 일본인 가정과 조선인 가정을 대비시키면서, 일본 정신을 체화(體化)한 일본인 가정을 본받으라고 선전한다. 모범적인 예로 일본인 가정이 등장하고, 조선인은 이들을 본받아 전시 동원에 적극 참여하라는 식의 동원 논리를 주로 전개했다. 또한 조선인 여성은 일본인 남편의 주부로서 ‘일본 정신’이 가득 찬 가정을 만들기에는 교육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부족한 존재로 생각되었다.375)「內鮮一體-木浦支店主催座談會」, 『內鮮一體』 1940년 1월. 일본인과 조선인 간의 위계질서를 위협하는 것보다 각각의 가정을 대비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여러 담론(談論)의 경쟁 속에서 우리는 조선인들이 당시 ‘처녀 공출(供出)’에 대한 공포 속에서 서둘러 조혼시켰던 것을 생각해야 한다. 전시 동원 체제 아래서 조선 총독부는 인적·물적 자원을 폭력적으로 동원하였다. 그리고 미혼 여성을 잡아간다는 공포는 징발을 피하기 위해 원하지 않는 상대와 서둘러 결혼해야 하는 현실을 만들었다.

내선 일체라는 정치적 의미로 한껏 주목받았던 조선인·일본인 부부는 광복 이후 험난한 현실과 만나게 된다. 한 일본 여성은 귀환 과정에서 조선인 남편을 일본에 데리고 가고 싶어 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그녀는 “내 일생은 내선 일체를 위해 희생되었다. 생선 가게 주인이었던 마을 회장과 경찰 서장이 나를 찾아와 모범 부부라고 잔뜩 축하하고, ……그 사람들은 벌써 도망갔다. 나는 일본인에게도 버림받고, 조선인에게도 버림받아 세상에는 의지할 곳이 없다.”며 울부짖었다.376)鈴木裕子, 앞의 책, 108쪽. G씨의 어머니는 약간의 토지를 받는 조건으로 일본인에게 시집보내졌다. 광복 후 G씨 남매를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일본 놈과 산 년’이라 하여 재혼한 남편의 구박을 받으며 살았다.377)최석영, 「식민지 시기 내선 결혼 장려 문제」, 『일본학연보』 9, 31∼34쪽. 호주를 중심으로 한 가부장적 가족 질서 속에서 여성들은 남편의 결정에 따라 새로운 공간으로 이주하거나 버림받았다.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였고. 민족적 적대감의 표출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인 여성과 조선인 여성이 처한 조건은 조금씩 다르지만, 여성들은 공식 결혼 관계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각각의 민족 공동체에 해가 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또한 재일 조선인들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발효(1952. 4. 28.) 이후 법적으로 외국인이 되었다. 일본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국적법에 기초한 귀화 수속이 필요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과 일본의 개인들은 각자의 욕망에 따라 만나고 결혼하였다. 상대편이 가지고 있는 계층적 우월성, 경제적 기반, 새로운 관계망과 기회에 대한 기대감 등이 다양하게 자리했다. 이러한 개인의 로맨스는 식민지 권력과 성별 권력 관계, 지리 공간적 역학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었다. 식민지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장려되기도 하고, 지배자로서의 일본인을 모호하게 하는 것으로 우려되기도 하였다. 또한 ‘남녀 일생의 대사’라는 차원에서 정략성을 비난받기도 하였고, 민족과 권력에 대한 일정한 선택이라는 차원에서 배신으로 비난받기도 하였다. 그 안에서 여성들은 공식 결혼 관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불안정한 지위에 놓이거나, 호주를 중심으로 한 가족 질서에 적응해야 했다. 식민주의 권력과 가부장제가 교차하는 지점으로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결혼은 광복 후 새롭게 편제되는 국가와 가족 질서에 다시 적응해야 했다. 그리고 그 경계에 놓인 개인들은 침묵하거나 잊었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