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1장 고대와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1. 고대의 배움과 가르침
  • 고구려
  • 태학
이병희

고구려는 일찍부터 한자를 사용하였으며, 유교가 여러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었다. 고구려 초기에 『유기(留記)』 100권이 편찬되었으며, 600년(영양왕 11)에 이문진(李文眞)이 『유기』를 재정리한 『신집(新集)』 5권을 편찬하였다. 자기 나라 역사를 편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문자가 그만큼 보편화되었다는 것과 문자를 가르치기 위해 교육을 실시하였음을 뜻한다.

372년(소수림왕 2)에는 태학(太學)을 세워 귀족의 자제(子弟)를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국가 체제가 정비되고 국왕 중심의 질서가 확립됨에 따라 국가 운영을 담당하는 관인층(官人層)의 수가 늘어났으며 교육 수준의 향상도 절실하였다. 그리하여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배움을 제도화·체계화할 필요성이 커졌고, 이에 태학을 설치한 것이다. 태학에는 귀족의 자제만 이 입학할 수 있었다. 고구려 사회에서 학교는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국 초기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며, 소수림왕 때 이를 제도화한 것으로 본다.

태학에서는 소형(小兄) 이상의 관등(官等)에 있는 자를 태학박사(太學博士)로 임명하여 교수를 담당하게 한 듯하다. 당시 역사 이해나 문장 저작 수준이 최고인 인물이 바로 태학박사였으며, 영양왕 때 『신집』 5권을 편찬한 이문진도 태학박사였다. 학교는 한문과 한자를 가르치려고 설립하였는데, 당시 중국의 교육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오경(五經)인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예기(禮記)』, 『춘추(春秋)』와 삼사(三史)인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그리고 『자림(字林)』, 『자통(字通)』, 『문선(文選)』 등이 중요한 교과목이었을 것이다. 또한, 중국 한나라나 신라의 국학(國學)에서 읽던 『효경(孝經)』과 『논어(論語)』도 배웠을 것이다. 귀족의 자제들은 태학에서 공부한 뒤 고급 관리가 되었을 것이다.

태학에서 공부한 것을 기초로 국가 행정에 필요한 문서를 처리하고 중요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며 인접국(隣接國)과 교섭에 필요한 외교 문서를 작성하였다. 관리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과 자세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교육 내용은 사회의 가치관을 통일하는 이데올로기적 성격도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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