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1장 고대와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1. 고대의 배움과 가르침
  • 백제
이병희

백제는 멸망할 때까지 학교를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백제에도 유학에 대한 이해가 깊고 한문 구사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 많았기에 유학과 한문을 교육하였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근초고왕 때 고흥(高興)이 역사책인 『서기(書記)』를 편찬했으며, 성왕 때에는 중국 양(梁)나라에 모시박사(毛詩博士)와 강예박사(講禮博士)를 청하기도 하였다. 모시박사는 『모시(毛詩)』를 전공한 전문가를, 강예박사는 『예기』를 강의하는 전문가를 말한다. 이러한 전문가를 초빙한다는 것은 백제에도 국가 차원에서 운영하는 교육 기관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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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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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기록에도 백제의 한문 공부에 대한 것이 있다. 즉, “백제국은 습속이 서사(書史)를 사랑하고, 그 가운데 뛰어난 자는 글을 지을 줄 알고 …….”라고2)『주서(周書)』, 백제전(百濟傳). 하였다. 또한, “서적은 오경, 자(子), 사(史)가 있고 표(表), 소(疏)를 짓는 것이 모두 중화의 법에 따랐다.”고3)『구당서(舊唐書)』, 백제전. 하였다.

백제는 『주역』, 『시경』, 『서경』, 『예기』, 『춘추』의 다섯 경전에 능통한 사람을 오경박사(五經博士)로 두어 유학의 연구와 교육에 힘을 쏟았다. 백제 말의 장군인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묘지명(墓誌銘)에, “어렸을 때부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사기』, 『한서』 등을 읽었다.”고 기록하였는데,4)「흑치상지 묘지명(黑齒常之墓誌銘)」, 『한국 고대 금석문』 1. 이러한 공부는 제도적인 뒷받침을 받아 가능하였을 것이다.

백제에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중히 여기는 풍속이 있었다고 하는데, 고구려인이 경당에서 기마와 궁술을 배웠듯이 백제에서도 제도적인 기관에서 이러한 것을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도덕으로서 유교를 중시하였다. 나아가 유학을 일본에 전하기도 하였다. 왕인(王仁)은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일본에 전해 주었으며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무령왕 때에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성왕 때에는 오경박사 왕유귀(王柳貴)를 일본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일본에 학자를 파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백제에서 유교를 중심으로 교육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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