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1장 고대와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1. 고대의 배움과 가르침
  • 신라
  • 화랑도
이병희

신라는 통일 이전까지는 화랑도로서 교육 전반을 대치하다가, 통일신라 이후에는 국학을 설치하면서 이곳에서 유교 경전을 가르치게 하였다. 화랑도는 촌락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한 청소년 조직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화랑은 본래 귀족 출신의 청소년으로 조직된 민간 단체였는데, 진흥왕 때 군사 조직을 편성하면서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성격을 띠는 조직으로 개편하였다. 신라가 팽창하면서 고구려, 백제와 치열하게 경쟁하게 되자 국가에서 인재를 양성할 필요가 더욱 커졌다. 여기에서 화랑 제도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화랑도를 닦는 자를 풍월도(風月徒), 풍류도(風流徒), 국선(國仙)이라고 불렀다. 화랑 집단은 각기 화랑 한 명과 승려 한 명 그리고 화랑을 따르는 다수의 낭도(郎徒)로 구성되었다. 낭도는 집에서 매일 노동하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는 평민 이상의 계급이지만, 중심 구성원은 진골(眞骨)과 6·5·4두품이었을 것이다. 화랑도는 낭도 자신의 의사에 따라 결합하였으며 조국 수호, 나아가서는 이상 세계 건설이라는 원대한 공동 목표를 위해 일정 기간 수련하는 단체였던 만큼 구성원 사이의 인적 결합은 매우 긴밀하였다. 낭도는 대체로 15∼18세로 구성되었으며, 한 화랑이 이끄는 인원은 200∼300명에서 1,000명 안팎의 집단이었다. 진평왕 때는 많으면 7개 이상의 화 랑 집단이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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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서기석
임신서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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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도의 교육 목적은 인격 완성을 꾀하는 동시에 국가에 생명을 바쳐 봉사할 뿐 아니라, 임전무퇴(臨戰無退)하는 상무 정신을 기르는 데 있었다. 화랑도는 일정한 기간을 정해 놓고 단체 생활을 하였다. 신라 사회에서는 통상 3년을 하나의 서약·수련·의무 이행 기간으로 잡고 있었으므로 화랑도 역시 수련 기간이 3년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원광(圓光)이 제시한 세속오계(世俗五戒)는 화랑도가 지켜야 할 덕목이었다. 세속오계 가운데 충(忠)은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의 형성에 부응하는 것이었고, 효(孝)는 가부장적인 가족 제도의 발달에 따르는 것이었으며, 신(信)은 화랑도 같은 집단생활에 필요한 것이었다. 또한, 임전무퇴는 정복 전쟁을 수행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한 덕목을 갖추기 위해 화랑도는 수련 과정을 거쳤다. 7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는 두 화랑이 시(詩), 상서(尙書), 예(禮), 전(傳)을 3년 안에 차례로 습득하기로 맹세한 사실이 새겨져 있다. 시는 『시경』, 상서는 『서경』, 예는 『예기』, 전은 『춘추좌씨전』·『공양전(公羊傳)』·『곡량전(穀梁傳)』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 비석으로 화랑이 공부한 내용을 알 수 있다.

화랑들은 경주의 남산을 비롯하여 멀리는 금강산이나 지리산같이 이름난 산과 내를 순례하였다. 산수를 유람하고, 도의를 서로 닦으며, 음악을 즐기는 것이 주된 교육 내용이었는데, 산수를 유람하면서 자연애·국토애·조국애를 길렀으며, 도의를 익힘으로써 충군(忠君)·애국·효도·우정을 함양하였고, 음악을 익히고 즐김으로써 풍류(風流)와 소양을 키웠다. 엄격한 도의를 연마해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였으며, 밖에 나 가서는 충성으로 국가에 봉사하였다. 흔히 회자(膾炙)되는 화랑들의 용전(勇戰) 태도는 이러한 교육을 통해 익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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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이 수련하던 장소
화랑이 수련하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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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이곳저곳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심신을 단련하는 가운데 단체 정신을 함양하였고, 나라에서는 수련 과정을 거쳐 양성한 인재를 관리로 활용하였다. 김대문(金大問)은 『화랑세기(花郞世紀)』에서 화랑 제도를 평하여 “현좌충신(賢佐忠臣)이 여기서 솟아 나오고 양장(良將)과 용졸(勇卒)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5)『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37년. 하였다. 이는 교육 체제의 하나로 화랑도 제도가 매우 성공적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삼국통일 후 평화가 지속되고 사회가 안정되자 초기 화랑이 보이던 무사적(武士的) 성격은 사라지게 되었다. 신라 말에 이르러서는 사회 혼란을 틈타 반대파를 제거하는 데 동원되기도 하였다. 권력 싸움에 동원되는 사병적(私兵的)·문객적(門客的) 성격을 띠는 조직으로 변질한 것이다.6)이기동, 「신라 사회와 화랑도의 역사적 전개」, 『화랑 문화의 신연구』, 한국 향토사 연구 전국 협의회 편, 문덕사, 1996.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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