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1장 고대와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1. 고대의 배움과 가르침
  • 신라
  • 유학 교육과 국학
이병희

신라에서는 한문을 사용하면서 자연히 한문학이 발달하였다.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의 비문도 고도의 한문 문화가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글이다. 진흥왕 순수비는 『서경』과 『논어』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고대 국가의 왕자 권위를 자랑하고 있다. 또한, 545년(진흥왕 6)에는 『국사(國史)』를 편찬하였다. 강수(强首)는 통일 전에 이미 『효경』, 『이아(爾雅)』, 『곡례(曲禮)』, 『문선』을 스승에게 배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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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진흥왕 순수비
창녕 진흥왕 순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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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글은 외국 문자인 한자와 한문을 쓰면서 말은 우리말로 하는 데서 생기는 여러 가지 불편을 없애기 위하여 독특한 차자 표기법(借字表記法)을 발전시켰다. 이것이 이두(吏讀)인데, 7세기 후반에 들어와 설총(薛聰)이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682년(신문왕 2) 국학의 학장격인 경(卿)을 둠으로써 국학이 정식 교육 기관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국학에는 문묘(文廟)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717년(성덕왕 16)에 왕자 김수충(金守忠)이 당(唐)나라에서 공자와 10철(十哲), 72제자의 화상(畵像)을 들여와 국학에 안치한 데서 비롯한다.7)『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성덕왕 16년.

국학에서는 공자를 교학(敎學)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 그의 사당에 석전(釋奠)의 예를 행함으로써 국학의 권위를 높였다. 799년(소성왕 1)에 진주 거로현(巨老縣, 지금의 거제도 아주동)을 학생의 녹읍(祿邑)으로 설정하였다.

국학의 직제(職制)를 살펴보면, 학장급인 경을 비롯하여 박사(博士), 조교(助敎), 대사(大舍), 사(史) 등으로 편성되었다. 경의 정원은 1명으로 11관등인 나마(奈麻)에서 6관등인 이찬(伊飡) 사이에서 임명하였다. 실제 교수를 담당한 관직은 박사와 조교였다. 대사와 사는 실무 담당자로 여겨진다.

국학에 입학할 수 있는 학생의 자격은 왕경인(王京人) 또는 소경인(小京 人)으로 현재 대사 이하의 경위(京位)를 가지거나 관등이 없더라도 장차 가질 수 있는 사람으로 한정되었다. 학교에 다닐 수 있는 나이는 15∼30세였으며 재학 기간은 9년을 원칙으로 하였다. 만일 9년 안에 학업을 이루지 못하면 나이나 재기(才器)를 보아서 선별하여 재학을 허락하였다. 일단 국학에서 학업을 마치면 나마나 10관등인 대나마(大奈麻)를 주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국학 입학생은 대부분 6두품의 자제였다고 할 수 있다.8)이기백, 「신라 골품 체제하의 유교적 정치 이념」, 『신라 사상사 연구』, 일조각,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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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명문 목간(論語銘文木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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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을 마칠 때에는 학력을 시험하여 등급을 매겨 관리로 등용하였으므로 국학은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국학에서는 『논어』, 『효경』을 비롯하여 『예기』, 『주역』, 『상서』, 『모시』, 『춘추좌씨전』, 『문선』 등을 배웠다. 교육 과정은 셋으로 구분되었는데, 『논어』, 『효경』, 『예기』, 『주역』이 하나이고, 『논어』, 『효경』, 『모시』, 『춘추좌씨전』이 하나이며, 『논어』, 『효경』, 『상서』, 『문선』이 또 하나였다. 『논어』와 『효경』을 필수 과목으로 한 것은 국학이 수신(修身)에 치중하였던 점과 유교의 지도 원리인 충효 등을 신라 사회의 지도 이념으로 삼으려 한 것을 보여 준다.

<표> 국학의 구성과 변천
시기  신문왕 2년(682) 경덕왕(742∼765)  혜공왕(765∼780) 인원수
명칭 국학 태학감(太學監) 국학 
구성원 사업(司業) 1명
박사 박사 박사 약간명
조교 조교 조교 약간명
대사 주부(主簿) 대사 2명
4명

각 분야의 전문가인 여러 박사가 등장하는 점도 교육의 다양화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711년(성덕왕 13) 2월 상문사(詳文司)를 통문박사(通文博士)로 고쳐 서(書)·표(表)의 사무를 맡겼고, 714년(성덕왕 16)에는 의박사(醫博士)·산박사(算博士)를 1명씩 두었으며, 749년(경덕왕 8) 3월에 천문박사(天文博士) 1명과 누각박사(漏刻博士) 6명을 두었다고 한다. 그 밖에 금석문 자료에 주종대박사(鑄鐘大博士)·차박사(次博士)·전자조박사(鐫字助博士) 등이 보인다. 이들은 특수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후계자 양성 등 일정한 교육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그만큼 국가 차원에서 제도화한 배움의 영역이 확대되었음을 뜻한다.

788년(원성왕 4)에 독서삼품 출신과(讀書三品出身科)를 정하였는데, 이것은 국학의 졸업 시험 제도 같은 성격이다. 원성왕은 사회가 변하면서 유명무실해진 국학을 재건하고 그 기능을 확충하기 위해 이것을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독서삼품과는 인재 등용 방법이며, 국학의 성적 제도이기도 하였다. 국학에서 배운 과목을 중심으로 3품으로 선발하되, 특히 우수한 자는 특채 혜택을 주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품과 : 『춘추좌씨전』, 『예기』, 『문선』, 『논어』, 『효경』에 밝은 자

중품과 : 『곡례(曲禮)』, 『논어』, 『효경』을 읽고 통달한 자

하품과 : 『곡례』, 『효경』에 능통한 자

특품과 : 오경·삼사·제자백가서에 통달한 자

국학의 학생은 경위를 가진 왕경인으로 대부분 6두품인 듯하다. 독서삼품과를 통해서 골품이 아닌 학문적 능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하는 것은 신라에서 귀족 관료가 탄생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국학 출신 유학자 가운데 일부가 지방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지방의 학문 수준을 높이는 데 기 여하였으며, 유교적 도덕관념을 확산하는 구실을 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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