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1장 고대와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1. 고대의 배움과 가르침
  • 발해
이병희

발해의 주자감(胄子監)은 당나라의 국자감(國子監)에 상응하는 교육 기관이었으며, 책임자로 감장(監長)을 두었다. 주자감에서는 왕족과 귀족 자제를 교육하였다. 주자감에서는 고구려 지방 사회에서 설치하여 운영한 경당의 교육 전통을 이어서 유학 교육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발해는 독창적으로 충(忠)·인(仁)·의(義)·지(智)·예(禮)·신(信)이라는 유교 덕목을 6부의 명칭으로 삼았는데, 이는 발해 사회에 유학이 깊숙이 침투해 있었음을 실증한다. 당나라에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해 대량으로 서적을 수입한 사실과 유학생을 당나라에 많이 파견한 사실에서 유학 교육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왕 이후 발해 사회에는 유학이 널리 보급되었으며, 선진 문화가 지속적으로 유입됨에 따라 마침내 9세기에는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까지 불리게 되었다.11)송기호, 「9세기 해동성국(海東盛國)의 실현과 국가 위상」, 『발해 정치사 연구』, 일조각, 1995.

문왕의 딸인 정효 공주(貞孝公主)의 묘지명에서 공주의 배움에 관해 언급하였는데, “일찍이 어려서부터 여사(女師)의 가르침을 받아 …… 시(詩)와 예(禮)를 즐겼다.”고 하였다. 여사는 여성 교사를 뜻하므로 여성이 교육 지도자로서 활약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원시 사회에서는 생존 방법을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다. 사냥이나 어로 방법, 도구 제작이 배움의 중요한 내용이었으며, 농경이 발달함에 따라 그에 관한 것을 배우는 것도 긴요하였다. 그리고 종교 의식의 거행 방식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였다.

사회가 발달하고 국가가 형성됨에 따라 이를 운영하기 위한 배움도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고조선 말기에 한자와 한문이 전래되면서 배움의 수준이 한층 높아지게 되었고, 생각이나 사상, 경험 내용을 문자로 표기하여 전수할 수 있게 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삼국 모두 국가에서 교육 기관을 설치하여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가르치게 하였다. 박사를 두어 귀족의 자제에게 배움을 제공하였으며, 배움을 거친 이들은 국가의 인재로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국가의 운영에 필요한 각종 문건을 제작하였고, 외교 문서를 작성하였으며, 역사 경험을 기록하였다. 고구려의 경당이나 신라의 화랑도에서는 활쏘기를 배우는 등 심신 단련도 배움의 중요한 내용이었다.

통일신라에서는 국학을 설치하여 『논어』, 『효경』을 비롯한 경전을 가르쳤으며, 이들을 관리로 등용하였다. 말하자면 국학은 국가의 관리 양성 기관의 기능을 한 것이다. 독서출신과는 국학의 졸업 시험과 같은 제도였으며, 성적에 따라 차등을 두어 관리로 등용하였다. 발해에서는 주자감을 설치해 국가에서 필요한 인재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통일신라와 발해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많이 파견하였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당나라의 빈공과에 급제하기도 하였다. 통일신라 말기에는 당나라에서 귀국한 유학생들이 활동할 여지가 없음을 비관하여 산속에 은거하는 수가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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