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1장 고대와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2.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국자감
  • 국자감 설치와 폐지 논의
이병희

국자감에서 하는 교육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으로 여겨져 국가 차원에서 보호하고 육성하였다. 국가에서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므로 양성 과정 전체를 국가가 책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통일신라 이래 행정 중심지였던 9주 5소경에 ‘학원’이라는 이름의 교육 기관이 있었다. 그리하여 각 지방에는 경전과 사서를 공부한 인재가 다수 있었다. 후삼국시대 각 지방의 호족도 자신의 필요에 따라 교육을 실시하였다. 지방 행정을 꾸려가고 지방민을 교화하기 위해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물을 양성할 필요가 있었다. 정식으로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인재를 양성할 수도 있었고,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특정 기관에 소수의 사람을 소속시켜 교육할 수도 있었다.

예컨대 지금의 청주 지방인 서원경(西原京)에는 학원이 설치되어 교육을 담당하였다.12)김광수, 「나말여초(羅末麗初)의 지방 학교 문제」, 『한국사연구』 7, 1972. 그리하여 전국에 유교적 소양을 갖춘 지식인은 널려 있었을 것이다. 각 호족과 소통하기 위하여, 후백제나 태봉(泰封)과 교류하기 위하여, 지방 행정의 문기(文記)를 작성하기 위하여 일정한 소양을 갖춘 인사가 지방마다 필요하였고, 또 그러한 인사를 확보하고 있었다.

각 지방에 경사(經史)를 공부한 지식인이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예가 여럿 있다. 최응(崔凝)은 황주(黃州) 토산 사람이었는데, 오경에 통달하였고, 왕유(王儒)는 광해주(光海州) 사람으로 경사에 통달하였으며, 최지몽(崔知夢)도 영암(靈巖) 사람으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였다.13)『고려사(高麗史)』 권92, 열전(列傳)5, 최응·왕유·최지몽. 혼란한 후삼국 때에도 각 지방에서 경사에 통달한 지식인을 양성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초에 국가에서 설치한 원봉성(元鳳省)에서도 교육을 담당하였다. 원봉성은 학문적 관부(官府)로서 유학 이념을 보급하였는데, 유학도 교육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성종 때 시무책(時務策)을 올린 최승로(崔承老)가 일찍이 태조 때 원봉성 학생으로 수학하였던 데서 알 수 있다. 태조는 최승로가 12세 되던 937년에 그를 불러 『논어』를 읽게 한 뒤 매우 가상히 여겨 염분(鹽盆)을 하사하고 이듬해 원봉성 학생으로 소속하게 했다.14)『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2, 성종 8년 5월. 최승로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유학에 대한 기본 소양은 원봉성 학생이 되기 전에 갖추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급 공부는 원봉성에 들어온 13세 이후에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원봉성에서 한 공부도 매우 중요하였을 것이다.

원봉성 이외에도 한림원(翰林院), 광문원(光文院)에서 학생 또는 서생이란 명칭으로 학문을 연수받는 이들이 있었다. 국가에서는 필요한 인력을 이러한 문한(文翰) 기관에서 교육함으로써 양성하였다.15)박찬수, 『고려시대 교육 제도사 연구』, 경인문화사, 2001, 43∼50쪽.

986년(성종 5)에 이미 지방 학생 260명을 중앙으로 불러들여 교육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 학생들은 성종이 내린 조서에 따라 여러 부(府)·군(郡)·현(縣)에서 자제를 선발해 학업을 닦도록 개경으로 보낸 이들이다. 당시 군현의 수를 생각해 보면, 각 군현에서 1∼2명을 보낸 것이 되며, 그들은 대개 그곳 토착 향리(鄕吏)의 자제일 가능성이 크다.

이들이 어떤 기관에서 어떠한 내용으로 공부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국가에서 지방 출신 학생 260명을 받아들여 교육하였다면 특정 기관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260명 가운데 귀향하려는 학생이 207명이었으며, 남아 있기를 원하는 학생은 53명이었다. 남아 있는 53명에게는 각각 복두(幞頭) 2매를 지급하였는데,16)『고려사』 권74, 지(志)28, 선거(選擧)2, 학교(學校), 성종 5년 7월. 이 복두는 과거 합격자가 홍패(紅牌)를 받을 때 쓰는 영예의 관이었다. 이로써 국가가 이들을 극진히 예우하면서 공부하게 한 것을 알 수 있다.

국자감 창설이 명시된 것은 992년(성종 11)이지만 이것은 제도적인 재편성으로 보이고 실제로 이보다 앞서 운영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국가를 세운 초기부터 국가를 운영하는 데 관리가 많이 필요하였고, 실제로 많은 관원이 여러 행정 부서를 맡아서 운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인을 육성하는 기구로서 특정 관부가 일정하게 기능하였지만, 이와 별도로 학교가 운영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이미 신라에서 국립대학으로 국학을 운영한 역사적 경험이 있으므로 고려도 초기부터 국가에서 필요한 인재는 국가적으로 육성하였을 것이다. 993년(성종 12)에 당나라 제도를 참작하여 국자감으로 재편성하였는데, 이 사실을 가리켜 국자감을 창설하였다고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17)박성봉, 「국자감과 사학」, 『한국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75, 176쪽.

국자감을 설치한 효과는 과거 급제자 수의 증가에서 확인할 수 있다. 989년(성종 8)에는 제술과(製述科), 명경과(明經科)의 합격자 수가 이전의 1회 평균인 3.3명의 약 6배나 되는 19명으로 늘어나고, 이후 계속 증가하여 목종 때는 평균 25.6명으로 급증하였다. 그러나 현종 때는 반으로 줄고, 다시 덕종 때는 평균 8.5명으로 감소하였다. 이것은 현종 때 두 차례의 거란 침입으로 국내외 정세가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그 후 국자감은 점점 쇠퇴하였다.

최충(崔沖)이 사학을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063년(문종 17)에 국자감은 이미 거의 폐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부하는 이들의 목적은 관직에 나아가는 것인데, 국자감보다 사학이 더 유리하다면 사학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아마 최충이 사학을 설립한 직후부터 사학에서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1102년(숙종 7)에는 당시 재상 소태보(邵台輔)가 국자감을 폐지하자고 주장하기에 이른다.18)『고려사』 권74, 지28, 선거2, 학교, 숙종 7년 윤6월. 여기에는 국자감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한 사정이 전제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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