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1장 고대와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2.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국자감
  • 예종·인종 때의 강화책
이병희

사학이 번창함으로써 국자감이 크게 위축되었는데, 예종·인종 때에 이르러 국자감의 기능을 적극적으로 강화하였다. 이것은 교육을 국가가 관리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학제(學制)를 개편하고 재정 지원을 늘렸으며, 모든 과거 응시자는 국자감에서 교육을 받게 하였다.

1109년(예종 4)에 교과 과정을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7개의 전문 강좌인 7재(七齋)를 설치하였다. 예종은 시부(詩賦) 위주의 교육보다 경의(經義)에 통달할 수 있는 교육을 중시하여 7재를 두었다. 이 가운데 여섯 개가 유학재(儒學齋)이고 한 개가 무학재(武學齋)였다. 7재의 이름은 이택재(麗澤齋, 주역), 경덕재(經德齋, 모시), 구인재(求人齋, 주례), 복응재(服膺齋, 대례), 양정재(養正齋, 춘추), 대빙재(待聘齋, 서경), 강예재(講藝齋, 무학)였다. 국학에 7재를 둔 후 태학(유학 6재로 보임)에 최민용(崔敏庸) 등 70명을 시험으로 뽑고, 무학에 한자순(韓子純) 등 8명을 시험으로 뽑아 나누어 공부하게 하였다.

7재를 설치함으로써 국자감은 일반 국학생과 7재생으로 구분되었고, 이 7재생이 삼사제(三舍制, 외사, 내사, 상사)의 상사생(上舍生)이었으며, 일정한 기준에 들게 되면 예부시(禮部試)에 직부(直赴)할 수 있었다. 7재는 명실상부한 최고 학부로서 권위를 갖게 되었는데 종전에 국학을 기피하던 귀족 문벌 가문의 자제가 이곳에 모여 들었다.

그리고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는 반드시 일정 기간 국자감에서 수학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1110년(예종 5)에 과거 제도를 새로이 개편하면서 제술, 명경 등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국자감에서 3년 동안 공부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19)『고려사』 권73, 지27, 선거1, 과목(科目)1, 예종 5년 9월. 지금까지는 사학에서 공부한 뒤에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고 또 다수가 합격하였지만, 이제는 사학에서만 수학해서는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국자감의 위상은 크게 향상될 수 있었고, 반면 사학은 국자감의 하위 교육 기관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19년(예종 14)에는 국자감의 재용(財用)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였다. 양현고는 국자감에 소속한 토지에 대한 권농(勸農)과 수세(收稅)까지도 담당하였다. 재정 지원 속에 국자감 학생들은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재정 지원으로 서책(書冊) 지원도 많아지고 거처하는 공간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으며, 식사의 질도 향상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좀 더 안락한 조건에서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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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성균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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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년에는 국자감의 건물도 중건하였다. 이때 국자감의 건물은 송나라의 삼사(三舍) 제도를 따라 설계하였다. 삼사는 외사(外舍), 내사(內舍), 상사(上舍)로 구분하여 학생들의 교육 성과에 따라 재사(齋舍)가 올라가는 것이었다.20)신천식, 「중앙의 교육 기관」, 『한국사』 17, 1994, 17쪽, 25쪽. 즉, 처음에는 외사에 속하여 공부하였으며 공부가 진척되면 내사로 옮겨가 공부하였고, 마지막에는 상사에서 공부하게 하는 것이었다. 상사에 속한 학생은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같은 해에 담당관에게 명하여 학사(學舍)를 널리 세우고 유학(儒學)에 60명, 무학(武學)에 17명을 두어 근신(近臣)에게 그 사무를 감독하게 하고, 유명한 유학자를 선발하여 학관·박사로 삼아 경의(經義)를 강론하며 가르 치고 지도하게 하였다. 예종 때의 적극적인 국자감 진흥책으로 국자감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예종에 이어 인종도 교육 진흥에 힘을 기울였다. 초기에 일종의 학칙인 학식(學式)을 제정하여 국자감 운영을 크게 바꾸었고, 그동안 형부(刑部)에서 담당한 율학(律學)을 국자감으로 옮겨 경사 6학(국자학·태학·사문학·율학·서학·산학)을 정비하였다. 이는 국자감에서 공부시키는 범위를 크게 넓힌 것으로 그만큼 국자감의 활동 영역이 팽창된 것을 뜻하였다. 이로써 국자감의 위상이 높아졌음은 물론이다.

인종 때에 자세한 학식을 제정하였는데, 그 가운데 입학 자격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21)『고려사』 권74, 지28, 선거2, 학교, 인종.

① 국자학

   문무관 3품 이상의 자손

   훈관(勳官) 2품으로서 현공(縣公) 이상의 직위에 있는 자(者)의 자(子)

   경관(京官) 4품으로서 3품 이상의 훈봉(勳封)을 받은 자의 자

② 태학

   문무관 5품 이상의 자손

   문무관 정·종 3품의 증손

   훈관 3품 이상의 봉작(封爵)이 있는 자의 자

③ 사문학

   훈관 3품 이상의 봉작이 없는 자의 자

   훈관 4품 이상의 봉작이 있는 자의 자

   문무관 7품 이상의 자

④ 율·서·산학

   문무관 8품 이상의 자

   서인

   문무관 7품 이상의 자로 원하는 자

⑤ 입학 무자격자(국자학·태학·사문학)

   잡로(雜路)에 관계되는 자와 공(工)·상(商)·악(樂) 등 천업(賤業) 종사자의 자손

   대·소공친(大·小功親)을 범하여 결혼한 자와 가도(家道)가 바르지 못한 자의 자손

   악역(惡逆)을 저지르고 귀향한 자의 자손

   천(賤)·향(鄕)·부곡인(部曲人)의 자손

   자신이 사죄(私罪)를 저지른 자

경사 6학 입학 자격에 대한 규정은 철저히 귀족주의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인종 이후 이 학식에 따라 국자감이 운영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고려 학식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는 아버지와 조상의 관직 고하에 따라 입학을 달리했다는 국자학, 태학, 사문학의 구분은 고려 전 시기를 통하여 존재하지 않았다. 학식에 명시된 것처럼 신분에 따라 학부가 구분되지는 않았고, 국학(생) 또는 태학(생) 등으로 널리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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