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1장 고대와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2.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국자감
  • 고려 후기 위상 변천
이병희

무신이 정권을 잡자 학교 교육은 다소 위축되었지만, 제도 면에서 큰 변화는 없었다. 정권은 무인이 장악하였지만,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원은 필요하였다. 구세력을 제거한 뒤여서 새로운 관원이 더 많이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국가에서는 국자감에서 새로운 예비 관인을 많이 양성해야 했다.

김보당(金甫當)의 난(1173) 직후에 무신의 무자비한 살육으로 교육이 일시 위축되기는 했어도 전기의 전통은 대체로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 후 이어진 몽고의 침입으로 정부가 강화(江華)로 천도하고 육지가 몽고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자 한때 교육의 맥이 끊어지기도 하여 이 시기가 고려 교육 에서 가장 암흑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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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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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로 천도한 뒤에도 국자감을 강화로 옮겨 교육을 실시했다. 1243년(고종 30)에는 양현고의 관원을 4명 더 늘려 기능을 강화하였다. 또 최우(崔瑀)는 쌀 300곡(斛)을 양현고에 보내어 선비를 양성하는 데 쓰게 하였다.22)『고려사절요』 권16, 고종 30년 6월. 역시 국자감의 재정 문제가 가장 중요하였던 것이다. 재정 문제가 해결되자 배울 학생을 확보할 수 있었고, 양질의 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1251년(고종 38)에는 강화 화산동(花山洞)에 국자감을 새로 짓고 공자의 초상화를 봉안(奉安)하는 등 국자감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23)『고려사』 권24, 세가24, 고종 38년 8월. 피난 가서도 국가는 국자감의 교육에 각별히 배려한 것이다. 이로써 고려에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하였는지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충렬왕 말기에 안향(安珦)은 찬성사(贊成事)가 되어 관원에게서 은과 포를 차등 있게 거둬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국자감 재원으로 삼았으며, 남은 돈으로 국학의 비품과 도서를 확충하였다. 또한, 대성전(大成殿)을 준공하였으며, 자신의 논밭과 노비까지 국학에 기증하여 양현(養賢)의 비용으로 삼았다. 안향이 국학 부흥에 온 힘을 쏟자 수강자가 수백 명에 이르는 등 국학이 면모를 새롭게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가 안향이 죽은 뒤에 계속 이어지지 못하였다.

국자감은 1275년(충렬왕 원년)에 원나라의 간섭으로 관제를 고치면서 국학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298년(충렬왕 24)에 충선왕이 한때 즉위하여 관제를 개혁할 때 성균감(成均監)으로 바뀌었다. 그 후 1308년에 충선왕이 관제를 개혁하면서 성균관(成均館)이라 고쳤다. 1356년(공민왕 5)에 배원 정책(排元政策)과 함께 원나라의 간섭으로 격이 낮춰지면서 개편되었던 관제를 문종 때의 것으로 복구시켰는데, 이때 성균관을 다시 국자감이라 고쳤다. 그 후 1362년(공민왕 11)에 다시 성균관이라고 고쳤는데 이 명칭이 고정되었다.

1367년(공민왕 16)에 불타버린 성균관을 재건하였으며, 사서오경재(四書五經齋)를 설치하고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이색(李穡)을 대사성(大司成)에 겸임시켜 성균관 운영의 책임을 맡기고 경학에 능한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박의중(朴宜中), 이숭인(李崇仁) 등 당대 일류의 소장 학자들을 뽑아 학관(學官)을 겸하게 하였다.24)『고려사』 권115, 열전28, 이색. 또한, 과거제를 개혁하여, 1368년(공민왕 17)에는 경전의 내용을 묻는 시험을 국왕이 친히 실시하였으며(親試), 이듬해에는 향시·회시·전시의 차례로 과거를 치르는 과거 삼층법(科擧三層法)을 원나라에서 도입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로 성균관 교육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우왕 초에 종장(終場)의 과문(科文)이 대책(對策)에서 시부(詩賦)로 바뀌고 학교 재정 또한 궁핍해져 교육이 위축되었다. 공민왕 때 국학 진흥에 앞장섰던 이색이 “성균관 뜰에는 이끼만 푸르고, 글 읽는 소리 끊어졌네.”라고25)이색(李穡), 『목은시고(牧隱詩藁)』 권17, 「유회성균관(有懷成均館)」. 탄식할 정도로 침체되었다.

공양왕 때 교육에서 주목되는 것은 성균관에서 경학과 예학만을 전담하고 나머지 기술학, 곧 악학(樂學), 병학(兵學), 율학(律學), 자학(字學), 의학(醫學), 풍수음양학(風水陰陽學), 이학(理學), 산학(算學)은 해당 관아에서 교육하기로 한 것이다. 기술학이 국자감에서 완전히 제외되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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