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1장 고대와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2.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국자감
  • 시설과 학관
이병희

국자감의 모습에 대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국자감은 이전에 남쪽 회빈문(會賓門) 안에 있었다. 앞에는 대문이 있는데 방(榜)을 국자감이라 하였다. 그 구조는 중앙에 선성전(宣聖殿)을 두고 양쪽 행랑에 재사(齋舍)를 설치하여 재생을 거처하게 하였다. 이전의 제도 는 극히 좁았는데 지금은 예빈방(禮賢坊)으로 옮겼다. 이로써 학생들이 많이 불어나고 그 제도가 사치스럽게 되었다.

대문에는 국자감이라는 방이 써 있었으며, 유교의 성현을 모시는 공간을 두고 있고, 재사를 설치하여 학생들이 거처하게 하였다. 재사가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학생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지방 출신 학생이 많기 때문에 학생이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통학하는 이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자감의 학관(學官)은 기본적으로 경전에 조예가 깊고, 시문을 탁월하게 작성해야 하였다. 국자감의 학관으로는 국자박사(國子博士)·국자조교(國子助敎)·태학박사(太學博士)·태학조교(太學助敎)·사문박사(四門博士)·사문조교(四門助敎)가 있었다.41)박용운 외, 앞의 책, 2003, 18쪽.

예종 때 국자감을 진흥시키면서 학관도 당연히 유능한 이를 선택하였다. 1119년(예종 14) 7월 “유명한 유학자를 선발하여 학관·박사로 삼아 경의를 강론하며 가르치고 지도하게 하였다.”고42)『고려사』 권76, 지30, 백관1. 한편, 1076년(문종 30) 경정 전시과(更定田柴科)에 보이는 국자감의 직관은 다음과 같다(『고려사』 권78, 지32, 식화1, 전시과, 문종 30년).

직관 국자좨주 국자사업 국자박사 대학박사 국자조교 사문박사 대학조교 사문조교·율학박사 율학조교·서·산 박사
전시과 5과 7과 8과 10과 11과 12과 13과 14과 15과

하는 것이 그것이다.

<표> 문종 때 국자감의 학관43)『고려사』 권74, 지 28, 선거 2, 학교, 예종 14년 7월.

교육
직관
 제거·
동제거·
관구
판사 좨주 사업 국자박사 대학박사 주부 시문박사 학정 학록 학유 직학 서학박사 산학박사
품계 ? ? 종3 종4 종6 정7 종7 종7 정8  정9 정9 종9 종9 종9 종9
정원 각 2명 1명 1명 1명 ? 2명 2명 ? ? 2명 2명 4명 2명 2명 2명

인종 때의 학식에 따르면 국자학·태학·사문학에는 교관으로 각기 박사와 조교를 두는데, 반드시 경학에 우수하고 덕행이 높아서 능히 스승이 될 만한 자를 택한다고 하였다. 학생에게 경서를 한 가지씩 가르치되 반드시 그 경서를 마치게 해야 하며, 다 마치지 못하면 다른 과목으로 바꾸지 못 하게 한다고 하였다. 박사와 조교는 연말에 강의한 분량을 계산하여 이것으로써 근무 성적의 평가 자료로 활용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율학·서학·산학에는 박사만을 둔다고 규정하였다. 이로써 인종 때에 경학을 중시한 것과 시부를 잘하는 이를 교관으로 삼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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