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1장 고대와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2.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국자감
  • 학생의 활동
이병희

국가가 위기를 맞으면 국자감의 학생 가운데 일부를 뽑아 군(軍)에 편입시키는 일도 있었다. 1042년(정종 8)에는 국자감 학생 가운데 장년이 되어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사람을 광군(光軍)에 보충하기로 결정하였다.44)『고려사』 권81, 지35, 병(兵)1, 오군(五軍), 정종 8년. 그리고 1218년(고종 5)에 학생의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시를 시험 보아 80명을 두고 나머지는 군대에 편입하였고, 1283년(충렬왕 9)에 학생 가운데 일부를 동정군(東征軍)에 충당한 일이 있었다.45)『고려사』 권81, 지35, 병1, 오군, 충렬왕 9년 3월. 그러나 이러한 일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으며, 그들은 방해받지 않고 학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보호를 받았다.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기에 국가는 이들의 수학을 뒷받침하였다.

국자감의 학생들은 국가적인 의례에도 참석하였고, 국왕을 위해 가요(歌謠)를 바치기도 하였다. 공자에게 제사 지내는 석전(釋奠)을 할 때 국자감의 학생이 참석하였다. 봄철 침원(寢園)에 제사 지낼 때 학생들은 행사가 끝난 뒤 국왕에게 노래를 불러 드렸다. 1170년(의종 24) 왕이 행차 후 궁에 돌아왔을 때 관현방(管絃房)의 대악서(大樂署)에서 채붕(綵棚)을 설치하여 왕을 영접하였는데, 이때 학생들은 국자학관의 인솔을 받아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46)『고려사』 권19, 세가19, 의종 24년 정월. 원종이 원나라에서 돌아왔을 때 국자감 학생들이 국왕에게 가요를 바쳤으며, 충렬왕과 제국 대장 공주(齊國大長公主)가 원나라에서 돌아왔을 때도 가요를 드렸다.47)『고려사』 권89, 열전2, 후비2, 제국 대장 공주.

학생들은 때때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1130년(인종 8) 어사대(御史臺)에서 비용이 많이 든다면서 국자감의 학생 수를 줄이자고 하 자, 학생들이 궁궐에 몰려가 글을 올려 어사대의 주장을 반박하였다.48)『고려사』 권74, 지28, 선거2, 학교, 인종 8년 7월. 1159년(의종 13) 국왕이 대안사(大安寺)에 행차하였을 때 학생 이양평(李良平)이 길에서 왕을 뵙고 정책에 대한 의견을 말한 일이 있었다. 공민왕이 피난 가느라 문선왕(文宣王) 제사가 폐지되자 학생들이 다시 제사 지낼 것을 요청했다. 공양왕 때에는 성균관의 학생들이 과격한 벽불소(闢佛疏)를 올리기도 하였다.

국자감 부흥에 힘썼던 안향이 세상을 떠나자 장례식 날 학생들이 소복을 입고 길가에 나와 제사를 올린 일이 있다. 학생들의 사회 활동이 조선 시기보다는 활발하지 못했지만 상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국가의 의례에 참여하였고, 시정(時政)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을 제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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